세계관-경제학 3.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

오피니언·칼럼
기고
  •   
류현모 교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도록 명령하셨다. 요즈음 학문으로 비유하자면 동물분류학에 해당한다. 동물의 형태에 따라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인 일이며,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그 생명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선상에서 그 사역에 동참을 의미한다. 그들의 일은 의식주 해결과는 관계가 없었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일을 통해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때문에 일에 수고와 괴로움이 추가된 것이다. 농사를 방해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인해 인간이 땀 흘려 수고해야 흙에서 나온 소산을 겨우 먹을 수 있는 힘든 노동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생산성이 낮던 고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고된 노동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았다. 성직과 일상의 직업을 구분하던 중세에는 직업도 이분법적으로 성스러운 일과 세속의 일로 나누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 스콜라주의에서는 성직자들의 사색과 명상의 삶에 더 높은 가치를 두어, 땀 흘리는 세속적 직업과 노동의 가치는 낮게 여겼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기쁨의 일이 되기보다는, 고역의 노동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성직과 속된 일이 구분되고, 성스러운 주일과 속된 6일로 구분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 속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일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다.

종교개혁은 일에 대한 이분법적 생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수도원의 삶을 비판하면서 세상의 직업에 대해 처음으로 소명(vac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제후 중심의 봉건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국가교회 제도와 타협하면서 초기의 직업에 대한 소명이론을 경제적인 부분으로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직업의 소명의식(calling)과 자본주의는 칼빈주의적 직업윤리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부산물로 보고 있다. 이 직업윤리 하에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절약하는 것을 통해 자본이 축적되었고,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막스 베버와는 달리 트릴취나 비엘러는 “노동과 자본에서 발생한 이윤은 그것을 벌어들인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라는 칼빈의 주장을 들어 칼빈주의를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재세례파로부터 파생된 모라비안들은 재산을 공유하고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신정주의적 공동체를 유지하는 등 강력한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형성했으나 봉건주의의 열매를 누리던 영주들에게 진압된 바 있다. 이에 비하면 칼빈주의는 사유재산을 찬성했으며, 재산의 불균등도 하나님의 섭리이고, 각자 받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색채가 강한 것이 분명하다. 성경의 경제정의를 하나의 경제체제 만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칼빈주의 역시 어느 하나의 경제체제로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

존 스토트는 <현대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일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하고, 공동체에 유익이 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일이 우리 삶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일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높으며, 인간의 육체를 좀먹고 영혼을 억압하는 일들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실업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며, 이런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로 내몰리게 된다. 코로나로 발생한 많은 실직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해결을 위해 어떤 접근을 해야할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일은 첫째 개인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개개인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 일을 통한 수입보다, 그 일을 통해 얼마나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을 개발해 나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둘째, 일은 관계의 문제이다. 일터 안에서 또 일터 밖에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좋은 일이다. 즐겁게 소통할 수 있고, 일과 휴식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일터가 좋은 일터이다. 셋째, 일은 공동의 문제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직장문화를 만들어 가느냐의 문제이며, 이 부분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법이 일터에서 실행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무 경쟁적이 되거나, 부정직하거나,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 끝으로 일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보존하면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환경오염, 탄소배출, 에너지 소비가 높은 일들은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미래 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앞으로의 세계는 지식이 모든 생산수단을 지배하게 되며, 이에 대비한 후세 교육 없이는 어느 나라든 생존하기 어렵다.”라고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재 한국의 교육에 대해 “학생들이 하루에 15시간씩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차세대에 필요한 지식과 살아남을 직업은 무엇인가? 다보스포럼의 호스트인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에서 물리학, 정보학, 생물학 기술을 새 시대를 이끌 지식으로 제안하면서, 이 지식들이 집약된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어야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앞으로의 시대에 살아남을 직업군과 사라질 직업군을 살펴보면, 타락으로 인해 원래의 일에 추가된 단순노동들은 모두 사라지는 직업군에 속해 있다. 반면 타락이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창조적인 일들은 살아남을 직업군에 여전히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자녀들에게 어떤 직업을 추천할 것인지에 지침이 될 수 있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창조사역에 동참하라고 우리들에게 명령하신다.

묵상: 나의 직업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어떤 관계인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류현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