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위한신학포럼이 26일 오후 2시 제69회 헤르만 바빙크 설교 세미나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박태현 교수(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설교학)는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박 교수는 “헤르만 바빙크의(Herman Bavinck, 1854~1921)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며 교회를 위한 그의 신학 사상과 실천적 면모를 살피는 일은 후대 교회와 신학자들의 마땅한 의무일 것”이라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설해 가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인 바빙크의 발자취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모토였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정도(正道)를 걸어감으로써 후세대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들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개혁신학은 단순히 과거의 신학적 내용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전통을 통해 오늘의 시대적 변화 앞에 선 교회의 신학과 실천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혁교회가 오랫동안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semper reformanda)를 모토로 삼아 신앙과 생활의 개혁을 외쳤던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아닐 수 없다”며 “이런 점에서 바빙크는 오늘날 우리의 21세기 교회 건설의 디딤돌이 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 멀리 더 높게 바라보기 위해 어깨 받침을 제공하는 영적 거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바빙크의 개혁주의 신학은 그의 ‘걸작’(magnum opus)인 「개혁교의학」 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며 “현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 팩커(J. I. Packer) 박사는 ‘벌콥의 교과서와 벌카우어(Berkouwer)의 「교의학 연구」는 작은 언덕과 변방의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바빙크의 명작, 「개혁교의학」은 ,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Everest)’라고 평가한 뒤 바빙크는 어거스틴, 칼빈, 그리고 에드워즈와 같이 위대한 정신 박식함 영원한 지혜와 위대한 강해 기술을 지닌 신학자였다. … 바빙크의 권위 있는 「개혁교의학」은 내용이 알차되 명료하며 노력이 요구되나 만족스러우며, 넓고 깊고 예리하고 견고하기에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교의학 가운데 최상의 작품성을 지닌다’고 적극 추천했다”고 했다.
또한 “바빙크의 실천적 신학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현장의 문제들을 다루는 윤리학으로 뻗어나가 당대의 현안들을 다루는 책들을 출판하였다.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바빙크는 「현대의 도덕」, 「기독교 가정」, 「현대사회에서의 여성」, 「기독교 ,전쟁, 민족동맹」을 출간하여 네덜란드의 도덕, 가정, 사회, 전쟁을 포함한 기독교적 문화 갱신을 추구했다”며 “도널드 맥클라우드(Donald Macleod) 역시 같은 맥락에서 신학은 반드시 선포로 이어져야 한다고 바르게 지적하였다”고 했다.
그는 “바빙크 전문가인 제임스 에글린턴(James Eglinton) 박사는 2017년에 설교와 설교자에 관한 바빙크의 몇 개의 글들을 영어로 번역 편집하여 소개했다”며 “에글린턴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교회사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칼뱅, 그리고 바르트를 ‘설교자로서의 신학자’로 지적했는데, 이는 그들이 많은 신학 작품과 설교문들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반면에 교의학자인 바빙크는 그들과 달리 ‘설교자로서의 신학자’로서 언급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바빙크는 거의 평생 교수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원고 없이 설교했기 때문”이라며 “비록 바빙크가 설교학적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또한 그의 설교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설교 메시지와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없다 할지라도, 그의 몇몇 작품들은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근본적 방향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바빙크의 설교문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먼저, 바빙크는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할지라도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경적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며, 두 번째로 시종일관 철저하게 성경적”이라며 “세 번째로 신학적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에 있어서 매우 광대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바빙크의 설교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위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며 “먼저는 한국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열쇠권 즉 하늘나라를 열고 닫는 영적 권세로서 그 성격은 언제나 지배권이 아닌 섬김과 봉사의 권세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교회의 모든 봉사는 본질상 말씀의 봉사로서 설교 , 사역은 양날의 검처럼 긍정적으로 청중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 이단의 오류를 척결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며 “한국교회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회와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이단들의 오류를 드러내 교회를 건전한 교리 가운데 건설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과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내쫓아야 한다”며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드러내는 율법과 복음으로서 율법의 교훈적, 규범적 용법은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도 남아 있기에, . 율법은 언제나 복음과 연관되어 선포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둘째, 한국교회는 설교의 능력과 관련하여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의 자유로운 객관적, 주관적 사역을 기억하고 설교 사역 가운데 성령의 임재와 기름부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며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주는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의 재능이나 다른 주변적 환경이나 여건에 달려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은혜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사람의 의지를 꺾는 설득은 사람의 본성을 다스리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셋째, 참된 교회의 표지들인 복음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순수한 시행 그리고 교회 권징의 유지를 이 땅에서 완전하게 드러내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지상교회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한국교회의 가나안 성도들이 증가하는 이 때에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며 “비록 교회가 순수성을 많이 상실했다 할지라도 교회를 섣불리 곧바로 떠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상교회는 이상적으로 완벽하고 순수한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단지 순수성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넷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영생의 말씀을 설교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verbi divini minister)는 세상의 그 어떤 직무와도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런 직무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불일듯하여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거나 오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설교자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만이 증거되도록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 표절 문제는 설교자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를 맡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충성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설교자는 세상 철학과 지식이 아닌 성경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며 “오늘날 설교자의 개인적 견해로 장식하는 설교, 성령의 세례가 없는 무능한 설교는 다름 아닌 성경을 연구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 설교자는 교회의 교사이자 위로자인 성령의 언어와 하나가 되어 단조로움과 진부한 것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회중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전율케 하는 설교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마지막 다섯째, 설교자는 웅변의 원리 본질 그리고 형식 모두 온전한 사람이 되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웅변의 원리는 인간의 타락으로 언어가 부패한 데서 회복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했다.
아울러 “웅변의 본질은 전인으로부터 나와 전인을 겨냥하는 논증, 묘사, 설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웅변의 형식은 웅변의 내용에 부합해야 하는데 좋은 전달은 온전한 인격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언어로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기에 전인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도록 깨어 기도하고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청중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 역시 온전한 사람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