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백신 접종률이 높은 나라와 저조한 나라 간에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백신 접종률에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는 등 빠르게 일상을 회복하고 있는 반면에 접종률이 저조한 나라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더욱 불안감이 고조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20일 0시 기준으로 169만 9천여 명이 백신 1차 접종을 마쳤는데 접종률은 3.2%다. 이 수치는 OECD 37개 회원국 중 35위에 해당한다. 이런 현실이 말해주듯 지난 19~2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선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관련한 야당의 질타가 이어졌다.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은 홍남기 부총리 겸 국무총리 대행에게 “백신 1차 접종률이 세계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국민이 정부의 이야기를 안 믿는다”며 정부의 백신 늦장 대처를 따졌다. 이에 대해 홍 총리대행은 “정부는 4월까지 300만 명, 상반기까지 1200만 명, 올해 11월까지 집단면역 목표를 명확하게 제시했다”며 “정부를 믿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우리나라의 백신 접종률은 현재 전 세계 100위 권 밖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 나라보다 못하다는 통계도 있다. 야당 의원들이 “국민이 정부의 말을 안 믿는다”고 한 발언은 이런 현실을 두고 한 말이다. 지금의 백신 접종률과 속도대로 라면 집단면역에 6년 4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야당과 언론을 향해 근거없는 ‘가짜뉴스’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지 말라며 되레 호통치고 있다.
정부가 지금부터 백신 접종 ‘속도전’에 돌입한다고 해도 4월까지 300만 명, 상반기까지 1200만 명 접종 목표 달성을 장담할 수 없다. 돌발변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상반기 국내에 도입하기로 확정한 분량의 절반 이상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인데, AZ 백신은 최근 혈전 생성 논란으로 정부가 30세 미만의 접종을 금지했다. 백신을 맞은 사람 중에 ‘사지 마비’ 등 사례도 나타나고 있어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그렇다고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백신 변수 탓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우리 국민의 저력과 성숙한 시민의식, 선진적 방역 체계와 적극적 재정 정책 등이 어우러져 방역 모범 국가이자 경제위기 극복 선도그룹으로 평가받는 나라가 됐다”고 평가했다. 또 “백신 수급 불확실성으로 현저히 낮추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도 했다. 백신 확보와 접종에 ‘빨간불’이 켜졌는데도 대통령은 코로나19 방역 성과 자랑에 침이 마를 날이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말 정부가 백신 확보를 제때 못했다는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자 모더나 CEO와 화상통화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모더나 백신 2천만 명 분을 확보해 2021년 2분기부터 국내에 공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홍남기 총리대행은 20일 국회에서 미국 모더나 백신에 대해 “상반기에는 물량확보가 어렵고, 주로 하반기에 들어올 예정”이라고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이처럼 백신 수급에 차질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고도 책임지는 공직자는 없다.
우리나라가 백신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비밀도 가짜뉴스도 아니다. 이미 국내 언론뿐 아니라 미국 언론들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는 문제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백신 접종 속도를 두고 ‘느림보(laggard)’라는 표현을 쓸 정도다.
백신 접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문제의 전적인 책임을 언론 등 외부환경에 돌리는 정부가 자기들끼리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도 국민적 불안감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홍남기 총리대행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백신 접종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한미간에 ‘백신 스와프’, 즉 백신을 꾸어오고 나중에 (반도체 등으로) 갚는 식의 협력을 미국 측에 요청했다며 백신 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우리나라가 이처럼 백신 기근에 시달리게 된 근본 원인은 정부의 오판이 가장 크다. 정부는 지난해 화이자, 모더나가 가격을 너무 비싸게 부른다는 이유로 계약을 미루다 결국 두 백신 모두 조기에 확보하지 못한 채 안전성 검증 논란이 있던 AZ 백신 도입을 결정했다. 뒤늦게 화이자 백신 계약을 한 후에는 화이자 측의 더 구매할 의사 타진까지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백신 제조사가 비싼 값을 불러도 그게 국민 생명과 안전과 바꿀 문제인가. 그래놓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동맹국인 미국을 향해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눈물겨운 구걸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다. 정세균 전 총리는 불과 석 달 전 국회에서 “국내 백신을 개발할 것이기 때문에 수입 백신을 잔뜩 사놓으면 안 된다”, “우리는 가장 빨리 코로나를 극복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된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최근 문 대통령이 청와대 방역 책임자로 기용한 기모란 교수는 방송에 출연해 “백신을 미리 확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대통령의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성과 자랑과 정부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매일 700여 명의 신규 확진자나 나오고 있는 암담한 방역 현실을 초래한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판과 왜곡, 반성을 모르는 오만이 계속되는 한 방역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겹겹이 쌓이게 되고, 그만큼 코로나 종식의 길이 더 멀어지게 되리란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정부와 여당이 백신을 조기에 확보하지 못한 실책과 현재의 백신 수급 어려움에 대해 솔직하게 국민 앞에 시인하고, 사과하는 동시에 투명한 자세로 대안 마련에 나서라고 조언하고 있다. 지금 정부는 언론과 가짜뉴스, 야당에 이어 백신 제조회사에까지 책임을 전가하는 ‘남탓 타령’이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정부가 지금 그럴 입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