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가 최근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홈페이지에 ‘복음이 주는 자유, 첫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조 교수는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유대교식 안식일 규정을 넘어섰다. 그들은 먼저 날(Day)에 대한 규정을 바꾸었다. 이스라엘 특유의 날을 세는 방식을 따라 7번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지키던 것을 바꾸어, 주간의 첫날, 또는 안식 후 첫날을 모임의 날로 규정했다”고 했다.
이어 “이날 이들은 모여서 ‘떡을 떼었다.’ 이날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듯 아무것도 안 하는 날로 지킨 것이 아니라, 모여서 공동 식사를 하며 집회를 열었다”며 “굳이 집회라고 하는 것은, 이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형식이 갖추어진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여서 식사를 나누고, 복음을 나누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겠지만, 적어도 안식일 규정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와 크게 달라졌다. 이는 기독교도 유대교의 확장이라고 이해했던 유대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라며 “유대인들이 대놓고 ‘개’(dog)라고 칭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과 교제하는 것까지도 허락했는데, 이제 이들은 이 영광을 버리고 떠나버리려 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안으로 이방인들을 초대했으나 그들이 이를 거절하는 것으로 보았다. 언약 백성이 보기에는 구원받은 삶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일 규율의 준수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달라진 환경이 있었다. 첫째로, 기독교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이스라엘 안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로마 제국 안에 있었다. 즉 유대적 규율을 지킬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아니었다”며 “둘째로, 이들은 유대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공동체마다 유대인과 이방인, 또는 현지인들이 섞여 있었다. 그 구성 비율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이방인들 가운데 있던 유대인 공동체는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이들은 로마의 제도 안에서 구분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하나’가 아니라 다양성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며 “이런 구분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유효하지 않았다. 당연히 헬라인의 개념은 없었고, 여자는 숫자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종의 제도는 있었지만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종이라는 개념은 로마의 제도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특정 민족이나 계급, 계층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환경에서 결국 새로운 규율이 필요했다. 당시의 개념에서 전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율이 필요했다”며 “당시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는 물리적 거리로 인한 문화 차이와 공동체 내의 계급에 따른 인식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런데 이 모든 장애를 넘어서 함께 지킬 수 있는 규율이 새로이 필요해진 것”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선포한다”며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의 규율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단 하나의 전제 조건만 남게 되었다. 예수 믿는 것,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다 배설물이 되었다. 이제 바울은 이 자유를 선언하고, 신학적 설명을 이어간다. 그 가운데 안식일 규정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고 했다.
이어 “골로새서 2장의 주요 내용은 골로새 교회를 침범하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이다. 거짓 가르침은 ‘규례에 순종하며’,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며 “16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경고한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의를 한 바 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행15:20)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가장 최소한의 의무라도 지라고 했지만, 아마 이러한 것은 그렇게 명쾌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이 언급된다. 확실히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특정한 날에 대한 규율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안식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바울은 이러한 절기 등에 대해서, 복음이 주는 자유로 해방을 선포했다”며 “그러면서 17절에서 절대적인 선포를 한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결국,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는 일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어디까지 할 때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율법이 존재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안내해 주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 자체가 신앙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그 율법을 지킬 뿐”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 실체가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가 그의 몸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는데, 왜 굳이 그 그림자를 보며 그리스도를 상상하겠는가”라며 “규례를 지키는 것은 바로 손에 잡히는 신앙인 것 같다. 마치 그것만 행하면 우리의 신앙이 완벽해지는 것 같다. 손쉬운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자신임을 밝히셨던 그 말씀(마12:8; 눅6:5)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 눈을 열고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어 “로마서 14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좀 더 명확하게 안식일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며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것은 날에 대한 규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이다.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이 주는 자유’의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은 아니다. 정해진 그날이 다른 날에 비하여 더 거룩한 날이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주를 향해 지닌 마음이 중요할 뿐”이라며 “그래서 이어서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한 우리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담기 위해서 그 날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어느 날’이 아니라 ‘모든 날’이 우리가 주를 위해 드려야 할 날”이라고 했다.
아울러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결코 ‘어떤 날’이 중요하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날이 다 거룩하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지키려 하는 것은 단지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체가 되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신앙은 그 날을 지키는 것으로 증거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얽어맴으로써 신앙으로 인도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은 명확하다. 이 대전제 아래, 이제 모든 것에서 우리는 자유하다. 그래서 안식일을 벗어나 ‘주간의 첫날’을 지키는 것은 ‘복음이 주는 자유’의 가장 큰 증거 중 하나이다. 이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