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목사(기쁨이있는교회 담임)가 필그림교회 ICC 청년공동체가 주최하는 ‘크리스천 연애 준비학교’ 1주 차인 지난 10일 ‘하나됨, 하나님의 열망’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전했다.
조 목사는 “성경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는 것이 결혼, 이성교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서 출발하면 안 되고, 성경적으로 정의해보자.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생각하기 전에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창조하셨고,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데 어떻게 함께 있으려면 성숙해야 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라는 존재 안에서 서로 존중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0절은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인지 말한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었다고 나온다. 새 번역에선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라고 번역했는데, 짝은 함께 있어야 온전한 기능이 나온다.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의 배우자, 짝은 누구인가?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돕는 자, 헬퍼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란 존재는 반드시 서로 돕는 존재이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짝, 배우자의 개념”이라고 했다.
이어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다. 연애도 결혼도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타적 사랑의 핵심은 희생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희생하시므로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것을 뚫고 나가야 진짜 아름다운 결혼을 할 수 있다. 희생하는 사랑이다. 이게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다. 나를 못살게 굴고 화나게 하고 상처 주면 끝낸다. 결혼은 마음에 안 든다고 끊어낼 수 있는 계약이 아니라 결혼은 언약이다. 언약은 끊어낼 수 없다”고 했다.
조 목사는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기까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세우는 힘이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이다. 내 이기심을 채우고, 내 욕망과 꿈을 실현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타나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본인의 짝을 찾을 때 내 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내 짝은 어디 있나?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이 내 짝이 아니라 내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그 사람이 내 짝이다. 결혼 상대를 찾을 때 자기의 꿈, 욕망 어떤 것들을 충족시켜줄 사람을 찾는 건 성경적이지 않다. 아가서를 공부해 보면 솔로몬이 미성숙하고 부족한 술람미 여인을 찾았다. 그게 사랑이다. 이 세상의 사랑은 한마디로 말하면 배설이다. 내 욕구, 꿈, 성공을 분출시키기 위해 그 분출된 공간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 상대방의 기쁨을 위해 사랑할 때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맛볼 수 있다. 내 기쁨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창세기 2장 23절에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연애나 교제를 할 때 남을 함부로 여기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을 역추적해보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남도 함부로 여기는 것이다. 누가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아담의 이 고백은 자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아담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아가페의 사랑인데, 왜 이런 사랑이 이 시대 가운데 희석되었나? 세상이 주는 바벨탑의 영향력 때문이다. 바벨탑은 모든 사람을 탑을 쌓는데 필요한 부속품으로 여긴다. 결혼이 내 야망이 되고, 욕망의 실현이 될 때 배우자를 부속품, 소유로 보고, 존중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부속품이 기능을 잃으면 버리는 것이다. 바벨탑은 다 벽돌대로 찍어 만든 자기 존중이 없는 문화다. 결혼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 서로의 돕는 배필이 되어주는 것,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고, 기독교인들의 연애, 기독교 가정이다. 그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랑했던 모습이다. 그런데 왜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많은 크리스천이 헷갈리는가? 바벨탑의 영향력이 들어와 서로를 부속품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만든 제단은 바벨탑이 아니다. 다듬어진 벽돌이 아닌 다듬지 않은 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신다. 연애, 결혼 관계에서 결국 싸우는 이유는 내 벽돌 모양으로 맞추라는 것 때문이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돌을 쌓으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 15장 7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셨다. 이게 복음이요, 사랑”이라고 했다.
조 목사는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기쁨이 되는 게 결혼에서 왜 중요한가? 성경적으로 부부관계는 무엇인가? 내 성적인 욕망을 분출시키는 게 그리스도인의 성관계가 아니다. 크리스천의 잠자리는 내 욕망을 분출시키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내 욕망을 분출시키고 끝내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태도와 과정이 중요하다. 설거지도 해주고 주물러도 주고 사랑하는 아내의 만족을 위해서 섬겨 주는 것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서로 솔직하게 나누고, 잠자리에서도 서로를 존중하니까 대화가 많고 교류가 많다. 잠자리도 교류인 것이다.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존중한다는 게 무엇인가? 아가서 솔로몬의 고백처럼 검지만 검은 것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사랑이다. 결혼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검은 것들이 나타난다. 성경엔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나온다. 결혼은 벌거벗는 것이다. 가족력, 배경, 상처가 다 드러나고 숨길 수 없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검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저도 검은 게 엄청나게 많았던 사람인데, 아내가 제 검은 것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 주었다. 그러자 제가 치유되기 시작하고, 변화되기 시작하고, 묶임에서 풀어지기 시작했다. 검은 것들이 풀어지면서 제 아내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다는 확신과 함께 돕는 배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나도 저 여인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예비한 사람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만들어낼 수 있는 확신이 아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더 큰 확신으로 온다.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온전함의 하이라이트가 생명을 낳는 것이었다. 기쁨이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조 목사는 “왜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라고 얘기하냐면 , 하나 되었다가 검은 것들이 용납이 안 되어서 찢어지면 물리적으로 끝났지만, 평생 그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베소서 4장 1~3절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싸우고 부족함이 드러나도 우리는 하나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힘써 지켜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여러분의 배우자, 짝은 누구인가? 불쌍한 사람,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다. 나를 채워줄 사람을 보지 말고, 검은 것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게 사랑이다. 제가 결혼을 해보니까 좋다. 제 안에 있는 검은 것들이 치유된다. 그래서 저는 결혼을 치유, 온전함으로 가는 회복의 과정이라고 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