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회가 10일 오전 ‘20세기 개혁신학의 유산: 바빙크와 워필드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봄 학술대회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개회예배에서는 김근수 목사(칼빈대학교 총장)가 ‘깨닫지 못하느냐’(막8:14~21)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앞에서 보면서도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여기에 주님의 안타까움이 있다”며 “오늘날에도 보지 못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본 바를 증거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서 학술대회 주제발표를 맡은 김길성 박사(총신대 명예교수, 조직신학)는 ‘20세기 개혁신학의 유산: 워필드와 바빙크의 신학사상 이해와 평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박사는 “화란의 신학자요 수상을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박사가 자기 시대의 임무를 끝내고 소천(1920)하고, 이듬해(1921) 워필드 박사(Benjamin Brekinridge Warfield, 1851~1921)와 바빙크 박사(Herman Bavinck, 1854~1921)가 소천하자, 후대의 사람들은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한꺼번에 떠났다고 슬퍼했다”며 “2021년은 워필드와 바빙크가 소천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했다.
이어 “워필드 박사는 1851년 미국의 남부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출생하여, 동북부인 뉴저지대학(프린스턴대학교의 전신)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1876)하고, 애니 피어스 킨키드와 결혼하여 2년여 동안 유럽, 특히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연구하고, 독일 체류 중 산 등반 중에 심한 뇌우를 동반한 폭풍우에 영향을 받아 사모는 일생 워필드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병약한 상태(1915 소천)가 되었고,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또 “미국으로 돌아와서 남부인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 담임 목회자로 섬겼다(1877~1878). 1878년에 동북부인 펜실베니아 주, 앨리게니(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 신약교수(1878~1886)로 초빙되어 섬겼고, 1979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88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당시 뉴저지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892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1822~1878 교수)를 이은 그의 아들 에이 에이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 1878~1886 교수)를 뒤이어, 1887년 프린스턴 신학교 ‘교훈 및 논증신학’교수(1887~1921)로 활동했으며, 1921년에 소천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바빙크 박사는 1854년 네덜란드(화란) 호허페인(Hoogeveen)에서 국가교회에서 분리(1834)한 분리(Afscheiding)측 교회의 목사 얀 바빙크의 아들로 태어나, 즈볼러(Zwolle) 김나지움에서 공부하고 졸업(1873)한 후, 부친이 속한 교단 신학교(De Theologische School van de Afgescheiden Kerken)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며 “그러나 주위의 반대에도 레이든 대학교에서 1874년부터 공부하여 1876년에 예과과정, 1877년에는 학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1879년에는 독토란두스(Drs.) 과정을 마친 후, ‘츠빙글리의 윤리’(“De Ethiek van Zwingli”)라는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쓰고 박사학위(1880)를 받았다”고 했다.
또한 “당시 그는 갓 설립된 자유대학교 구약신학과 셈족 언어 및 문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881년 화란 프리스란트 주 프라너커르에 있는 분리측 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여 섬겼으며, 이 시기에 1625년 레이든 대학교의 네 교수들의 저술로 첫 출판된 「순수신학통론」(Synopsis Purioris Theologiae) 제6판을 편집하여 재출간(1881)하게 되었다”며 “당시 신학교재가 부족하던 터에 후에 신학생들을 위한 교의신학 교재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분리측 교단 총회에서 운영하는 캄펀 신학교에서 1883년부터 1901년까지 교수로 사역했고, 이 기간에 그는 결혼(1891)했으며, 1902년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후임으로 초빙 받아 암스테르담 소재 자유대학교(현 Protestant Theological University, PThU) 신학부 교수(1902~1921)로 사역했으며, 1906년 화란 학술원 회원이 되고, 또한 반혁명당 임시의장으로 활동하고, 1911년에는 화란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교수사역, 설교 및 강연으로 분주하게 보냈으며, 그중 1908년 프린스턴 신학교 초청 스톤 강좌에서 「계시 철학」(The Philosophy of Revelation)이라는 주제로 강연했으며, 1921년 소천했다”고 했다.
김 박사는 “워필드 박사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면 먼저, 워필드는 기본적으로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에 충실한 신학자였으며, 둘째로 워필드는 정통 칼빈주의와 역사적 개혁신학의 옹호자였다고 지적하고, 이를 증언하는 두 가지 특징을 기술했다”고 했다.
이어 “그가 기술한 두 가지 특징 중 첫 번째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 교리를 그의 신학과 사상의 선봉에 두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교회와 개인을 위한 신앙고백서의 중요성을 일깨웠다고 제시했다”며 “또한 바빙크 박사에 대하여는 첫째, 바빙크는 종교개혁 유산에 충실한 개혁주의 신학자였으며, 둘째로 바빙크는 성경신학에 기초한 교의신학자였다고 제시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워필드 박사는 신학대학과 신학교 및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한 파괴적인 자유주의에 학문적으로 대항한 것만 아니라, 교회의 안과 밖에 있는 세기말적인 세대주의에 대해서도, 또한 당시 자유주의에 대항한 범교단적인 근본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정통 칼빈주의,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면서도 학문에 기초한 변증적, 방어적(Defensive) 신학자의 삶을 살았다”고 했다.
또한 “바빙크 박사는 기독교에 대한 주변 로마 가톨릭의 활동과, 또한 기독교 세력을 퇴출하려고 시도한 화란 정부의 시도(1816. 국가주도형태의 교회법 실시; 1876.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이중교회법(duplex ordo) 실시; 2005. 교육부에서 국가임명교수좌와 교회임명교수좌의 이중구조 금지)에 대항하여, 신학뿐만 아니라 학문 일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했다”며 “모든 학문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제시하고, 사회활동에 깊이 관여109)하여 적극적, 공격적(Offensive) 신학자의 삶을 살았다”고 했다.
아울러 “후대의 신학자들에게는 두 가지 요소들이 균형적으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