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의 편지가 예배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거나 적어도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로마서 1:25에서 바울은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으며,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예배하고 섬겼습니다”(롬 1:25상[반절])라는 주장과 함께, 그가 인간들의 반역에 관해 비판했던 내용을 반복합니다. 그다음에 바울은 “창조주는 곧 영원히 찬송을 받을 분이십니다, 아멘!”(롬 1:25하[반절])이라고 덧붙입니다. J. 루이스 마틴(Louis Martyn)이 실마리를 주었고, 또 제가 다른 곳에서도 주장했듯이, 여기서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뵈뵈의 편지 낭독을 듣고 그녀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멘”은 예배라는 배경 안에서 본래부터 그 고유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벌리 로버츠 가벤타 - 로마서에 가면
무엇보다, 요한서신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은 ‘코이노니아’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의 큰 신학적 축의 만남의 결과이다. 그 하나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새 언약의 내용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결과로서 ‘코이노니아’이고, 다른 하나는 ‘묵시론적 이원론’을 배경으로 세상과 충돌하며 세상을 이기는 교회로서 ‘코이노니아’의 모습이다. 요한서신이 묘사하는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는 ‘에클레시아’와 함께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라 할 수 있다. 그 차이는, 에클레시아가 ‘…으로부터’(from) 부름 받아 나오게 된 언약 백성의 해방과 세상을 향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가리킨다면, 코이노니아는 그래서 ‘…에로’(into) 이르게 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과 그 영광의 본질적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컨대 구약의 옛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에클레시아’라고 한다면, 그들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거(居)하며 누리게 되는 언약 백성의 특징적인 생명의 삶을 ‘코이노니아’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채영삼 - 코이노니아와 코스모스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삶과 무관하게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예수의 처음 추종자들은 대체로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의 네 개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을 그의 삶의 이야기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스티픈 패터슨 - 수난을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