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신학회가 최근 145차 정기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한동수 박사(한국성서대학교)가 ‘19세기 미국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신유운동의 역사’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한 박사는 “20세기 중반 은사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유입된 이후, 신유와 방언 그리고 예언 등을 신봉하고 추구하는 운동이 반세기 동안 여러 형태로 교회들에 영향을 끼쳤다”며 “그런데 한 동안 뜨거웠던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논의는 현재 상대적으로 식은 것 같다. 한창 이슈가 되던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더 이상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은사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비판하던 장로교회들 안에서조차 여러 형태의 성령운동이 자리 잡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에 대한 정당한 논의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오히려 많은 장로교회들마저 익숙해지고 수용적으로 변해버린 이 운동에 대해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며 “특히 그 동안에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조직신학적인 비평과 성경신학적인 비평이 주를 이루었다면, 여기에 역사신학적인 비평이 더 활발히 추가되어야 한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 20세기의 은사주의 운동 중에서도 기도를 통해 신체적인 치유를 기대하는 운동은 사실 19세기 후반에 처음 발생한 신유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오순절주의와 20세기 중반의 은사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그 입지를 더 확장시켰다”며 “대부분의 신유운동가들은 직접적인 신유를 믿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처럼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고 믿었으며, 신유사역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를 증명하는 증거라고 설파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신유사역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다양했으며, 신유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신학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 중의 한 가지 유형은 신유사역을 온전함 및 속죄 교리와 연결시키는 것이었다”며 “이러한 입장에 있던 신유운동가들은 신유를 하나님의 방대한 구속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결코 20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주장은 아니며 이미 19세기의 장로교회 신유운동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19세기의 신유운동이 미국 기독교 내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제2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 사역자들은 믿음의 기도의 진정성과 능력을 강조했다”며 “그들은 천막 집회를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종류의 집회들에서 말씀을 전했다”고 했다.
이어 “ 영국의 성결운동이 대서양을 건너와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도 신유운동의 배경 중 하나”라며 “그 후에 미국 시민전쟁이 인해 미국의 사회와 교회에 심각한 영적, 물리적 쇠락 현상을 초래하자, 성결운동과, 자선 사업, 그리고 진정한 믿음의 회복에 관한 강조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은 새로운 도전을 받았으며, 그 사이에 신유 사역이 발흥했다”고 덧붙였다.
한 박사는 “이 운동의 선구자는 감독교회에 소속된 의사 찰스 컬리스였지만, 수많은 초교파적인 사역자들이 그에게서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장로교회 안에서는 윌리엄 보드먼, 앨버트 심슨, 그리고 로버트 스탠턴 등이 신유운동을 주도했다”며 “그들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은사중지론에 반대하면서 현대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반드시 질병의 치유가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의 신학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고 했다.
이어 “먼저, 그들은 신유사역과 옛 신학을 서로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기도 자체의 만능적인 효과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더 초점을 둔 것”이라며 “그들에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치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들은 기도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오래된 중심 교리를 붙들려고 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였다. 치유의 원인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곧 치료자였다”고 덧붙였다.
또 “둘째, 장로교 신유 사역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치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으며, 그것들을 모든 세대에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으로 해석했다”며 “다만, 보드먼은 성경의 치유 사건을 단순한 증거로 보았던 반면, 심슨과 스탠턴은 그 구절들을 속죄신학과 연결했다는 점에서 한단계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심슨과 스탠턴에 이르러서는 치유 이론을 속죄이론과 결합시켜서 신체적인 치유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한 부분이라고 보았다”며 “영적인 구속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면, 신체적인 치유도 주권적인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성경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구속을 대대로 전달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도 그의 구속된 백성들의 삶에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자들이 영적인 완전을 사모한다면, 그들은 또한 신체적인 온전함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죄로부터 해방되는 한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넷째, 믿음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다보니, 어떤 사역자들은 오직 기도만 하고 인간의 의학적인 처치를 전면 거부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며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상충된다고 믿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희석시키는 죄를 범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따라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고 했다.
한 박사는 “마지막 다섯째, 지면의 한계와 논의의 명확성을 위해 앞에서 상술하지 않았지만, 신유사역자들이 치유의 은사를 인정하게 된 사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방언과 예언운동으로 이어지는 고리 역할을 했다. 즉, 방언과 예언 운동을 펼친 사역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은사를 인정할 수 있다면 방언과 예언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 이 운동들을 강력하게 이끌게 된 것”이라며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심도 있는 별개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20세기의 은사주의 운동이 19세기의 신유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이 한 세기를 지나면서 신학적인 변증을 통해 점차 변화되고 수용되고 공고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왜냐하면 이것을 규명하고 인식함으로써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적법한 역사적, 신학적 비평과 대안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