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보이신 이 길을 엘리야는 갔고, 당신도 가야 한다. 용기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갈멜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용기는 진짜 적이나 상상 속의 적과 싸워 이기거나,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때 나타나지 않는다. 용기는 엘리야, 그리고 그의 길을 따랐던 모든 이들처럼 스스로 설 수 없을 때, 거친 광야에서 쓰러져 있을 때, 심지어 어서 죽음을 달라고 애원할 만큼 괴롭고 답답할 때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이 오면 엘리야처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시내산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갈보리산으로 가고 있었다. 당신도 엘리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잘 생각해 보라. 당신도 엘리야처럼 시내산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나, 돌아보면 갈보리산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만이 일어설 용기를 찾을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러셀 무어,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
로마서 12장에서도 바울이 청중들에게 그들의 “몸”을 드리라고 촉구하는 것은, 곧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의 전부를 드리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그 자체로, ‘혹 바울이 가진 “은혜”에 대한 이해가 실은 “값싼 은혜”에 지나진 않는가?’하는 우려를 강하게 반박합니다. 12:1-2을 보면, 바울에게 있어 은혜는 완전히 값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값비싼 것?모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바울이 자신의 회심 혹은 사도(임무)로의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몇 차례 표출됩니다. 복음을 위해 바울은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바울이?갈 1:11-17에서도?이러한 언급을 한 이유는 마치 페이스북에서 하는 소식 업데이트처럼 자신의 신앙 여정을 떠벌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가진 충격적인 영향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야말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다는 것을요.
비벌리 로버츠 가벤타, 로마서에 가면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긍정하며 타자와 겸손히 대화하는 성경읽기”다. 이러한 성경읽기가 우리의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사용하게 된다. 성경을 읽을수록 내 생각과 삶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빙자해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욱 고집하게 된다. 특히 세계관을 강조하는 성경읽기는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체주의적 위험성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사용하게 될 위험이 더욱 높다. 또한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자기중심성을 넘어 세계에 몸을 담그는 성경읽기”다. 이러한 성경읽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변화시킨다. 성경읽기는 인격적(personal)이지만 공적인(public)한 행위다. 그래서 성경읽기는 골방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private)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골방의 사사로운 행위로 끝나는 성경읽기는 자기중심성에 매몰된 타락한 성경읽기다.
전성민, 세계관적 성경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