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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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 남부순행 일기 Ⅰ

아펜젤러의 남부순행 일기를 번역 연재하며

아펜젤러 선교사의 남부순행 일기는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 서울에서 출발해 8월 31일 부산 땅에 도착, 9월 7일 서울에 귀경하기까지 23일간의 선교 정탐 여행기이다.

1889년 당시 미국 공사이던 딘스모어(Mr. Hugh Dinsmore)는 외부(外部)로부터 여행허가증인 호조(護照) 발급을 도와주는 대신 여행 중 설교와 선교 활동은 하지 말고 단지 1달간 전국 어디나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요즘은 8월의 더위가 예전보다 더하지만, 존스와 아펜젤러가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8월 16일~8월 31일 역시 한국의 불볕더위 기간이었다. 존스의 일기에 따르면 순행을 위해 그들 거주 구역의 중국인 집사 유 스트워드(Major Domo Eu Steward)에게 6달러를 주고 이동 침대와 모기장을 준비해 떠났다.

왼쪽부터 세 번째가 훗날 6대 이화학당장을 역임한 첫째 딸 앨리스, 맨 왼쪽이 아펜젤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부인 엘라.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

2020년 10월, 필자는 〈선교신문〉과 〈기독일보〉에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동행해서 처음으로 중부 내륙을 거쳐 부산까지 여행한 존스의 일기를 번역해 연재한 바 있다. 존스 선교사가 여행을 마친 2년 후 1891년 정리한 순행일기를 노블(William Arthur Noble, 魯普乙) 선교사가 거의 40년이 지나 1928년 KMF(The Korea Mission Field) 11월호와 1929년 1월호에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라는 제목으로 발췌 편집해서 실은 것이다.

아펜젤러와 존스 두 선교사가 함께 순행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조선 선교 책임자였던 아펜젤러의 일기 원본은 2021년 2월까지 번역,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필자는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 복사본을 지난해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0여 년 전 펜글씨로 쓴 일기의 복사본 상태는 판독(判讀)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외국인이 여행하며 기록한 필기체 손 글씨를 옮겨 적는다는 것은 정말 난해한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조카 베티(Betty Kim)가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으니 한번 해보겠다는 답이 와 이 자료 영문 타자를 부탁하게 되었다.

남부순행기 복사본을 거의 다 타이핑했을 즈음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아펜젤러 순행일기(Journal of H. G. Appenzeller from August 16, 1889)’ 영인본 파일 사용을 허락받게 되었다. 이 자료를 통해 보다 선명한 아펜젤러의 손 글씨를 보게 되어 미판독 단어를 채울 수 있어 미완 번역을 수정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1889년 부산에서 기록한 아펜젤러의 선교구상 일기. 빨간색 박스안 내용은 ‘우리는 이곳(부산)에 당장 진출해야 한다. 기다리며 시간을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일을 선교본부에 보고할 것이다’. ©Journal of H. G. Appenzeller, 배재학당 박물관

아펜젤러 순행일기에는 당시 부산에서 날씨가 험해 배가 뜰 수 없던 며칠간, 출항을 기다리며 아펜젤러가 작성한 향후 ‘조선선교 구상’과 1889년도 감리교선교회 연례회의에 보고할 보고서(초안), 그리고 연례회의를 주관하러 올 앤드류 감독(Bishop Andrews)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9월 3일 일기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에 전해오는 1889년도 연례회의 자료와 비교함으로써 선교사(宣敎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고, 또한 기존 보고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부산 선교부지를 택하는 과정, 조선 선교 책임자인 앤드류 감독과의 개인적인 편지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선교 비전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또한, 강산이 13번이나 바뀐 그 시대의 옛 지명을 아펜젤러가 한글로 표기한 것을 보는 즐거움도 있고, 이 땅에 복음 씨앗을 뿌리러 정탐한 두 분의 선교 활동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 생각한다.

여기에 아펜젤러가 순행일기에 쓴 옛 한글 단어들을 일기에 적힌 순서대로 소개해 본다. (원쥬, 대구, 지병, 경긔도, 량근, 강원도, 츙쥬, 경샹도, 문경ᄉᆞᄌᆞ, 문경, 병안도, 함참, 샹쥬, 션산, 진두, 지금 와소, 다 잘잇소, ᄅᆡ일 ᄯᅥ나오, 아부인, 쳥도, 남쳔, 미령, 낙동)

아펜젤러의 순행일기를 판독해 타이핑하는 작업을 해준 조카 베티와 그의 가족(Chin Kim & David Kim)에게 감사한다. 또한, 이 자료를 필자가 번역한 후 꼼꼼히 번역 감수를 해주신 강원대학교 영문과 신성균 교수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기꺼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신 ‘감리회본부 역사자료정보실’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부디 이 자료가 선교 초기 선교사를 연구하는 이들과 선교사역에 관심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역자로서 보람이라 생각한다.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1889년 8월 16일~9월 4일)

 

 

1890년대 동대문 밖 거리 ©GCAH Digital Gallery


현재의 동대문 모습 ©지미 리


1889년 8월 16일 금요일

지난 화요일 엘라와 앨리스1), 그리고 나는 제물포에서 하루를 지내기 위해 갔다. 앨리스는 매우 아파서 스크랜튼 의사께서 오후에 3번이나 연락을 주셨다.

내 딸 앨리스는 열이 많이 올라 밤에 잠을 잘 못 잤지만, 아침에는 많이 좋아졌다. 우리는 지난 토요일 중국 톈진 여선교회의 지웰(Mrs. Jewell) 부인, 유리스(Yuris), 그리고 글로스(Dr. Gloss) 의사를 대접하면서 정찬을 함께했다.

주일날 나는 준비도 하지 못한 채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2)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월요일 나는 1890년도 예산 계획을 세웠고 자정 녘에 작성을 마쳤다. 우리는 1,500달러를 요청했다. 올해 예산보다 적지만 1,500달러 예산이 통과된다면 남대문 안쪽에서 일반병원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존스 형제와 나는 원주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여행에 나섰다. 우리는 동대문을 통과해 넓은 도로를 지난 후 좁다란 승마길을 이용했다. 여인숙 현관에서 잠을 잤다3). 모기 퇴치 향은 피울 필요가 없었다. 우리 집 집사 유 스트워드(Eu Don Steward)4)가 만든 이동식 침대에서 잘 잤다. 바닥은 뼈가 많이 아플 만큼 딱딱하지는 않았다.

 

첫날 숙박지 현, 양수리 ©양평군

 1889년 8월 17일~18일 토요일~일요일, 지병 경기도

편안한 침대에서 새벽 5시에 마을 대표를 만났고, 우리 일행과 다른 사람들이 야외에서 자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잠을 잘 잤다. 5시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지만, 6시 전에야 출발했다.

우리는 세수하기 위해 한강 강변으로 내려갔다. 안개 낀 아침 나는 머리를 하늘로 향했고 그곳의 거미줄, 강 등의 환경을 보며 영감을 느끼며 하늘나라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함께하기를 바랐다.

오늘 오전 이동 길은 강둑을 따라 이어졌다. 10시에 우리는 양근(陽根)5)에 도착했고. 여기는 아담하고 잘 정돈된 마을이었으며 땅이 비옥하였다. 존스와 함께 나는 이곳 강에서 수영을 즐겼다. 이곳에서 우리는 지평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나아갔다.

 

1872년도 지평현 지도 ©양평군

 1889년 8월 19일 월요일, 원쥬 강원도

우리는 아주 평온하고 쉼이 있는 안식일을 지평(砥平)6)이라는 작은 현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150여 가구가 있었으며 그곳은 작은 샛강과 기름진 땅 가운데 집들이 있는 산골 마을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새벽 3시에 채근하여 먼저 보냈지만, 우리는 5시 이후에야 출발했다. 우리는 이곳7) 주막에 오기까지 지평에서 60리를 나아갔다. 도로는 길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험하고 경사가 심해, 말이나 다닐만한 좁고 깊은 계곡 길을 지나왔다. 이 긴 계곡은 나에게 북쪽의 송도로 가는 길을 생각나게 했다. 토지는 물론 그리 비옥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작하는 지역이었고, 곡물 상태는 좋아 보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작은 냇가 둑 위에 있는 지저분한 주막에서 식사하고 수영을 즐겼다. 이 계곡 길은 나무가 울창해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오늘 오후 우리는 여기까지 30리를 왔는데, 여기서부터 10리는 말(馬)로 이동하기가 험한 길이었지만, 우리는 강원도의 수도를 보기를 갈망했다. 나는 내가 낮은 언덕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보았던 대동강 둑 위로 펼쳐진 커다란 도성 평양의 모습을 추억하게 했다. 우리는 긴 여행의 보상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아니지만. 우리는 도성의 성벽을 찾기 시작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뭔가 찾으려고 도성을 둘 봤다. 거기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분지 한가운데 1천여 주택이 있었는데 이는 다른 목적에는 사용된 적 없고 단지 주거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주 도로는 오늘만의 냄새를 풍겼고, 매일, 매주, 매달 다른 냄새를 풍길 것이다.

강원감영 포정루 ©GCAH Digital Gallery

우리가 경험한 강력한 모습은 최소한 1년 내내 쉽게 기억될 것이다. 집들은 형편없이 지어졌다. 사람들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고 개들까지도 다마스쿠스의 개들처럼 누워있었다.

관찰사(觀察使)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고 물론 목사(牧使)도 그러하다8). 우리의 명함9)을 그 두 분께 보냈다.

 

원주 인근 불탑 ©GCAH Digital Gallery

 [미주]
1) 엘라 Ella Dodge Appenzeller는 1884년 12월 17일 아펜젤러와 혼인했으며 앨리스 Alice Rebecca Appenzeller (November 9, 1885-February 20, 1950)는 첫째 딸이다. 개신교 선교사의 자녀로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외국인이다.
2) 역자 주: KJV 버전 사사기 6장 12절 말씀이다.
3) 존스의 일기 내용과 함께 숙박한 곳을 추정해 보면 순행 첫날 숙박한 곳은 돌떼미나루터 건너편(현, 세미원 건너편) 양수리로 추정된다.
4) KMF에 소개된 존스의 일기에 따르면 순행을 위해 그들 거주 구역의 중국인 집사 유 스트워드(Major Domo Eu Steward)에게 6달러를 주고 이동 침대와 모기장을 준비해 떠났다.
5) 현 행정구역상 양평읍,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강하면, 강상면 등의 양평읍 서쪽은 楊根郡 歷史에 해당한다. 양평군(楊平郡)은 ‘楊根郡과 砥平郡’을 합쳐서 지은 이름이다.
6) 조선시대 지평현이 소재한 곳으로 현 양평 동쪽의 용문면, 지제면, 단월면, 청운면, 양동면 등은 砥平 歷史에 속한다.
7) 당시 아펜젤러 일행은 평해대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지평에서 60리 거리는 지평~고송~양동~솔치 고개를 넘어 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안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8) 당시 원주에는 강원감영과 원주목 아관이 있어 관찰사와 목사가 있었다.
9) 조선에 온 지 1년밖에 안 되는 존스는 그의 통역관 강 씨(강재형)한테 한자로 이름을 지어달라 해서 붉은 색지에 명함을 붓글씨로 써 가지고 갔다. 그가 기록한 당시 명함 크기는 세로 18㎝, 가로 13cm 크기였고 한자로 4자였다. 즉, 영문으로 Cho Chey Chong Sye는 George 趙指, Jones 悰時였을 것이라 David Kim은 추정했다.

※ 위 일기를 판독해 영문 타자한 Betty Kim과 번역 감수를 해주신 강원대학교 영문과 신성균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아펜젤러 #남부순행 #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