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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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무엘 목사

현대 인간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다. 인간과 짐승의 노동력에 의존하던 산업이 18세기 증기기관을 통한 기계화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수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1차 산업혁명). 그러나 증기에너지에서 전기에너지를 통한 대량생산 혁명까지 백여 년(2차), 전기에서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정보혁명까지 백여 년 걸렸다(3차).

21세기는 이런 축적된 물리적, 디지털적 혁명을 생물학적 영역과 연결하여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신기술을 통한 변화와 진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4차). 인공지능은 인간이 그동안 축적해온 모든 과학기술 데이터를 몇 시간에서 몇 일 안에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진보는 인류에게 희망찬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자율성을 가진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동시에 갖게 한다.

COVID-19는 21세기 초 인간문명의 푸른 하늘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침공으로 인한 사회적 격리와 경제적 타격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20세기 2차례의 세계대전과 미소의 냉전시대를 통과하며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제치고 인류에게 믿을 만한 대안으로 떠오르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코로나로 인해 도전 받게 되었다.

전세계는 지구촌으로 연결된 자유무역과 상생을 통한 진보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허겁지겁 통제와 봉쇄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아직 기세를 떨치고 있다. 아마도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코로나가 어느 정도 통제되는 수준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21세기가 펼쳐질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회-정치-경제적인 규범들이 21세기의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21세기 최대의 도전은 기후문제일 것이다. 이 도전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야기되었고, 기술발전의 속도를 넘어설 기세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당면한 코로나의 위협은 현재 우리 삶을 통제함으로 직접적인 위험의 감소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후문제는 과거 몇 십 년 전에 조절하지 않은 결과가 지금 미치고 있어 직접적인 조절이 불가능하다. 지금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 수준에서 1.5도 이상 넘지 않도록 미래의 혼란을 지금부터 예방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십여 년에 불과하다고 과학자들이 믿고 있다.

21세기의 기독교

이런 21세기의 도전 앞에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양가감정, 코로나 위기의 혼란,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미래의 불안은 인류에게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있는 대안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 같은 시험지를 받아 들고 모범답안을 찾아가야 하는 시대다.

과거에는 강대국들이 세계의 갈 길을 제시하여 왔다. 로마제국, 영국, 미국 등은 정치, 경제, 사회적 모델들을 개발하며 인류를 이끌어왔다. 종교는 정신적, 사상적 지주역할을 하며 사회적 규범과 안정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 회교, 불교, 힌두교 등은 자신의 종교권에서 막강한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21세기의 종교는 과거의 강력한 리더십을 상실해 가고 있고, 사회적 자원을 제공하기보다 갈등의 원인이 되어가고 있다.

서양세계의 강력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군주로 자리를 잡았던 기독교도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다. 초강대국 로마의 공인 종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사회적 규범과 결속력을 강화하였고, 인간의 덕목과 가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직자는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전까지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 법, 의료 등 주요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문예부흥 이후 기독교는 갈수록 사회 각 분야에서 권위를 잃어 왔고, 급기야 영적, 정신적 위안의 역할도 심리 상담의 영역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기독교가 제공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기독교의 스토리는 과학의 힘이 주는 쾌락과 희망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과학의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신의 초월성이나 알 수 없는 미래에 일어날 심판이라는 막연성을 뛰어넘어 버렸다. 더욱이 기독교의 편협하고 편파적인 정치 이념화와 극보수화는 기존에 기독교가 누리던 권위와 특권을 유지하려는 발버둥으로 보일 뿐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중심세력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고, 인간 삶에서 적절성과 연관성을 상실해 가고 자신들만의 집단으로 게토화 되고 있다.

21세기 기독인의 위치와 역할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은 이 모든 도전을 가속화시키며 기독교적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21세기의 지형 속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그 본질을 회복할 것이며, 본연의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1. 본질을 지키면서도 사회와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는 세속에 물들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사회와 소통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사도행전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는 복음의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이방인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여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대해 [선교신학의 도전]에서 저자들은 비록 기독교가 유대문화에서 출발하였고 유대 기독교인들로 시작되었으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유대문화를 넘어서 이방인들을 품는 결정을 내렸다고 해석한다.

또한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바울서신 등 신약성경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당시 언어와 사상을 이용하여 기록되고 전파되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복음의 핵심을 지키면서도 당시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멸망 후에도 생존할 수 있었고, 로마제국에서도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복음을 실천적으로 살아 내었던 그리스도인들 (행11:26)의 헌신이 있었고, 그리스-로마 사회와 소통될 수 있는 신학과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2. 교회 내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외적 야성을 길러야 한다.

현대 교회는 이미 중심에 자리잡고 성을 지키는 방어적 자세에서 잃어가는 권위와 특권을 사수하려 애쓰고 있다. 이미 기독교인들은 문명화, 교양화 되어 영적 야성을 잃고 맞서 싸울 힘을 상실한 채 고립된 성채 안에 머물러 있다. 야만적인 세속주의와 과학주의의 최신 무기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 지휘관 역할을 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은 낡은 전법과 구식 무기를 교인들에게 쥐어 주며 승리할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다. 지금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을 실천적으로 살아내며, 그 복음을 사회와 소통해야 할 때다. 교회 내부를 향해 설교를 할 뿐 아니라, 베리타스 포럼 (Veritas Forum) 같이 사회 구성원들을 향해 복음의 메시지를 소통하려는 공적, 선지자적 외침이 필요하다.

3.교회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낮은 자리에 서야 한다.

기존 기독교의 권위와 리더십이 통하지 않고 있는 시대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다수거나 우월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위 상실은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 중심에 있는 다수의 강자라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변방으로 밀려나는 소수의 약자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로마시대 핍박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봉사하고 섬겼던 것처럼,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함께 울며 웃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코로나시대에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현장예배를 강행하는 몇몇 교회와 목회자들의 주장은 이웃을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과 거리가 멀고 교회의 고립을 더 심화할 뿐이다.

박사무엘 목사(센트럴신학대학원 실천신학과 부교수 및 한국부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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