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회포럼이 19일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로 1차 온라인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날 최승락 교수(고려신학대학원)가 ‘고통의 신학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발제를 했다.
최승락 교수는 “고통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고통의 현실을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 속에 나타나는 네 개의 키워드(채찍(병), 가시, 눈물, 본)는 고통을 집약하면서 동시에 고통의 다각적인 측면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고통의 현상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고통을 극복하는 길이 담겨 있기도 하다”고 했다.
최 교수는 “첫 번째 키워드는 채찍(mastīx, 또는 병)이다.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가장 보편적인 통로는 병이다. 복음서에서 병을 지칭할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노소스’(νόσος)이다. 이에 비해 마가가 선호하는 단어는 마스틱스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가의 마스틱스라는 용어에 좀 더 집중해보고자 한다. 이 용어의 일차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는 채찍이다. 마가가 병을 지칭하기 위해 마스팈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람이 당하는 질병의 고통을 생생히 전달해주는 기능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마스팈스는 하나의 체감 언어이다. 살을 파고드는 채찍의 아픔처럼 병의 고통은 우리의 신체와 영혼에 잊을 수 없는 고통의 각인을 남긴다”고 했다.
이어 “고통의 언어와 믿음의 언어는 3인칭 진술과 1인칭 진술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고통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여인의 아픔의 깊이를 아시며, 그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서서 고통이 무엇이며, 나아가 믿음의 고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 하신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고통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고통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기능을 가진다. 우리는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며 “3자의 입장에 서서 양적으로 비교하려는 입장은 실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아픔이 된다. 혈루증 여인은 자신만의 깊은 아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의 고통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주신다는 사실이 놀라움 자체였다. 고통이 깊었던 만큼 그것을 넘어갈 수 있게 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또한 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아픔이 무엇인지를 체감적으로 아신다. 그것이 채찍질과 같은 아픔이라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병(mastīx)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채찍과 같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최 교수는 “우리는 고통을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 하나를 바울에게서 발견한다. 바울은 남이 알지 못하는 가시를 품고 살았다. 바울은 이 가시가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위하여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하였다고 밝힌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시의 제거보다 이것을 남겨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있는 이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신 속에 머물게 하는 통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 깨달음을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압축적인 문구로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작용하는 장소 또는 조건은 약함 속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약함이 있는 곳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바울은 약함이나 고통 그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약함은 약함 자체보다는 약함의 인정을 가리킨다.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는 모든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며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약함을 제거한 능력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의 능력이요 약함을 통한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약함은 강함이 결핍된 상태요, 강함은 약함이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했다.
최 교수는 “(일반적으로) 이 둘은 병립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강함의 통로라는 것을 밝힌다. 그에게 있어서 약함과 강함은 서로를 껴안는다. 약함은 강함의 조건이다. 약함 없이 강함이 경험될 수 없다. 강함은 또한 약함 속으로 깊이 침투한다. 이런 능력의 비결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기꺼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시의 고통이 없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축복은 가시의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가시는 나를 낮추심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다. 그 가시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위로할 줄 아는 위로의 사람들이 되게 만든다”라고 했다.
최 교수는 “세 번째 키워드는 눈물이다. 눈물은 고통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감의 통로이다. 우리의 아픔은 우리의 눈물을 통해 표현되는데, 그 눈물은 또한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함께 아픔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온전히 대변하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통곡과 눈물을 함께 겪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약함(소극적 차원)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능력(적극적 차원) 속에서 우리의 처지를 공감하시는 분”이시라며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을 아시는 분이다. 물론 그의 눈물은 우리의 눈물과 많은 차이를 가진다. 우리는 회한과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많다. 예수님께는 이런 눈물이 있을 수 없다. 그의 눈물은 참여와 연대의 눈물이며 동정의 눈물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서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분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찾는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와 함께 울기 위해 오셨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계 7:17, 21:4)께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셨다”고 했다.
최 교수는 “네 번째 키워드는 본이다. 이 단어 자체는 사실 고통과는 무관한 단어로 문자적으로는 아이들이 알파벳이나 그림을 배우기 위해 따라 쓰도록 만든 글본(writing-copy)을 가리킨다. 비유적으로는 사람이 따라야 할 하나의 행위 모델을 가리킨다”며 “우리가 이 단어에 집중하는 이유는 베드로가 이 용어를 우리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결 짓는 매개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용어는 고난이나 고통의 현실을 넘어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고 했다.
이어 “베드로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함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당위의 본과 발자취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베드로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은 고난과 고통의 현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고통과 슬픔의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의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나아가서 그 고통의 현실을 어떻게 선행의 기회로 바꾸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본’은 고난에의 참여인 동시에 고난 극복에의 참여라는 포괄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또, “고통의 순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진정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 속에서도 그가 걸으신 길을 따를 때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순간은 없다.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고난 당하심은 우리가 고난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이 그의 것과 같게 하기 위해서다.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은 참 어렵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생명줄과 같은 돌파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이 그것이다.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그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선한 길을 따랐던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고통의 세상 속에 남기는 우리의 희망의 발자취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 그런 존재로 살아 있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끝으로 최 교수는 “앞의 4가지 용어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이 시대에 교회가 감당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키 워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일”이라며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보편적 고통의 현상은 단순히 사회적, 물질적 차원의 대처만으로 치유되지는 않는다. 보다 깊은 영적 차원의 대처가 필요하다. 영적 돌봄과 영적 차원의 공감이 필요하다. 탄식과 눈물의 자리에 함께해 줌이 필요하다. 함께 울고 함께 손잡아 주는 연대의 마음과 실천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계 7:17, 21:4) 하나님을 함께 바라봄이 필요하다. 이는 치유 받은 치유자인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보편적 고통의 사태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교회가 교회의 본분을 회복하고, 목회 사역의 초점이 더 분명해지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이 고통의 세상 속에 더욱 편만하게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 권수경 교수(고려신학대학원)이 같은 주제로 첫 번째 발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