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누구를 말할 수 있을까? 요셉이다. 사실 요셉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요즘 우스갯소리로 ‘파란만장’이라 하면 ‘파란 거(만 원짜리 현금) 만장’이라고 한다. 만 원짜리 만 장이면 1억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요셉은 1억은 커녕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만다. 애굽의 시위 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으나 그에게 인정을 받아 집안 대소사를 맡는 위치까지 이르른다.
[2] 하지만 그것도 잠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고 강간미수범이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리가 이쯤 됐으면 벌써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나를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장본인들에게 원수 갚거나 복수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때 그의 원수나 마찬가지였던 이복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찾아와서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3] 요셉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어릴 때 꿈꾼 내용이 성취되는 너무도 가슴뿌듯한 순간이다. 하늘의 해달별들이 자신에게 절을 했다고 한 꿈의 성취 말이다. 당시 요셉은 더 이상 형들이 노예로 팔아버릴 때처럼 힘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닌 막강한 존재였다. 그의 한 마디면 형들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셉이 취한 행동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어버린다.
[4] 요셉이 형들을 용서했나 안했나? 모두가 용서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적이 없다.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말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았단 말인가?’라고 말이다. 그렇다. 어떻게 그렇다고 말할 필요가 있는가? 이제부터 설명을 해보자. 정말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적이 없다. 사실 요셉의 사전에는 ‘용서’란 단어가 없다.
[5] 어째서일까? 그의 사전에는 ‘미움’이란 단어도 없기 때문이다. 미워했어야 용서고 자시고 필요하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미워하지도 않은 이가 어찌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살다 보면 철천지원수처럼 결코 용서 못할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용서해야 할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용서’(forgiveness)란, 사전적 의미로 ‘다른 사람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6] 하지만 이런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실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용서’란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용서’란 ‘자신의 마음에서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악감정을 몰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악감정을 한 단어로 구체화시키면 뭐라 할 수 있을까? ‘미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할 때에는 그에 대한 미움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7] 요셉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에 대해 미움이란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런 흔적은 없다. 요셉은 처음부터 형들을 미워하기는커녕 사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가 어디 있을까? 우선 창 45:5, 7-8절에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8] 다음은 창 50:19-21절도 참조해보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9] 위의 구절들에서 보듯이, 요셉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이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처음엔 형들을 미워했다가 나중에 정신 차린 후에는 그들을 용서했다라고 보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렇다. 요셉은 처음부터 형들을 무조건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다.
[10] 손양원 목사님의 경우를 보자. 미국 유학을 계획하던 그분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이가 공산당 청년의 총에 맞아 순교를 했다. 손 목사님이 처음엔 그 범인을 미워했다가 나중에 용서를 하셨을까? 천만에다. 그분은 처음부터 범인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용서, 용서, 용서’가 아니라, 무조건 ‘사랑, 사랑, 사랑’일 뿐이었다. 이런 내 생각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자료를 주기철 목사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1] 다음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말씀에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용서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다. 마 5:4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고 하셨다.
[12] 오늘 우리에겐 죽이고 싶은 원수가 있지 않은가? 용서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 원수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용서할 맘이 생겼다고? 원수를 용서가 아니라 완전하게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명령이고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들이 몸소 행하신 사랑이다. 우리도 이 사랑으로 남은 생을 주위 불신자들과 타종교인들에게 참 기독교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다 가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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