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를 맞아서 1박 2일 일정으로 광주·전남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2월 중에 '아시아문화전당 특별법'과 '여순사건 특별법'의 제정을 약속했다. 30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174석을 가진 집권당의 대표가 공언한 것이니, 이미 통과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코로나19로 고통당하는 대다수 국민의 눈에는 아시아문화전당특별법도 그렇지만 여순사건특별법이 왜 그렇게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여순사건이란 어떤 사건인가?
역사라는 말에는 독일어로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라는 두 가지의 개념이 존재한다. 전자인 히스토리는 연대에 따라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기록의 역사'인데 비해, 후자인 게쉬히테는 역사적인 사건의 내면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입장에서 기술하는 '해석의 역사'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동안 히스토리에 의존하던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이 최근 들어 게쉬히테적인 경향으로 변하면서 많은 혼란이 빚어진다. 역사의 주체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관점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역사 '해석상의 다름'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이념적으로 왜곡하는 데서 나타난 '역사 평가'의 반전이다. 우리 정부는 진보 정권이 집권할 때마다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지난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시행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인데, 이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역사의 반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전남 여수·순천 지역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으로 남로당 당원이었던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 등이 주동적으로 일으킨 군사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의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이다. 따라서 종전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불렀지만, 1995년 김영삼 정부가 여수와 순천 시민을 '반란의 주체'로 오인할 수 있다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여순사건(여수·순천사건)'으로 공식화하였다.
여순사건의 비극은 제주 4·3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에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14연대에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해 제14연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당원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출병하기 위해 대기하던 여수의 14연대 병사들은 갑자기 들려온 비상나팔 소리에 연병장으로 달려 나왔다. 연단에 선 지창수 상사가 이들을 향해 기염을 토했다. “애국 병사 여러분! 우리가 총부리를 같은 형제인 제주도민에게 겨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동족상잔과 제주도 출병을 결사반대해야 합니다.” 이들은 가담을 거부하는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시내로 나가 여수를 장악하였고, 다음 날부터 순천·광양·구례·곡성·벌교·보성·고흥을 차례로 장악했다.
이렇게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한 이들은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처벌한다는 구실로 경찰을 비롯하여 부자와 목사 등의 우익세력을 처단했다. 여수에서 약 150명, 순천에서는 경찰관 70명을 포함하여 900여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 반란군은 여수은행과 순천은행에서 3억 9천만원 가량의 현금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0개 대대를 파견하여 진압작전을 개시하였다. 결과 반란군들은 일주일만인 27일 완전히 진압되었고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여순 10.19사건의 진상이다.
그런데 무자비한 학살 만행은 보복을 부르기 마련이다. 진압군과 살아남은 경찰들은 진압작전을 벌이면서 과도한 민간인 학살로 논란을 빚었다. 2009년 노무현 정부 시절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가 결정한 여순사건 당시 순천 일대의 민간인 희생자는 439명이고, 2010년에 결정한 여수 일대의 민간인 희생자는 124명이다. 이에 대해 여수·순천 지역사회는 당시 전남도 통계에 따르면, "1949년 한 해에만 1만 1131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주장하면서,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 제정'을 통한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5개의 각기 다른 여순사건 특별법이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 가운데 소병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의 핵심 내용은 여순사건의 진상조사와 함께 희생된 유족들에 대한 의료비와 생활지원금 등을 법률적·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통해 과거 ‘여순 반란’ ‘여순 군란(軍亂)’ 등으로 통칭되다가 1995년 ‘여순 사건’으로 공식명칭이 바뀐 해당 사건을 ‘여순 항쟁’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과거 ‘4·3폭동’으로 불린 제주 4·3사건을 ‘4·3항쟁’을 거쳐 '4.3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킨 것과 같은 경로를 밟는 것이다.
또 다른 법안에는 사건의 시기를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가 아니라, 지리산 금족령 해제일인 1955년 4월 1일까지로 확대하고, 대상 지역도 여수와 순천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전남 전체와 전북 남부, 경남 서부, 대구까지 포함하여 준 전국적인 상황으로 보는 내용도 담겼다. 이렇게 되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1955년까지의 공산주의 활동을 대부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완전히 다시 써야 한다. 공산주의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은 조국 통일을 방해한 반공주의자로 매도당하고, 근대화에 앞장 선 기독교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타도 대상이고, 일제 강점기 일본에 유학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친일파로서 '토착 왜구'로 치부된다. 여기에 '가진 자'들인 부자들을 합치면 여순사건 당시 학살 대상이 된 분단세력이 된다. 이들에게는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이 '헬(hell, 지옥) 조선'으로 바뀌어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역사학자 주철희는 “역사는 지배자의 역사에서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킨 주체자의 입장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하며 "여순 사건은 '4.3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로 출병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4연대 병사들이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고 봉기한데 대해, 이승만 정권이 '군대 반란'이라고 오명을 씌우고, 빨갱이 색출을 명분으로 자행한 국가 폭력"이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이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제주도 인민봉기’ ‘려수 군인폭동’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관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가 없어서 봉기했다”는 명분과 달리 정작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을 감행했다. 그들은 10월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여수경찰서 안에서만 경찰관 59명, 의용 경찰 20명, 의용 소방대원 5명, 우익계 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명을 총살했다. 순천경찰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에 간행된 <순천시사>에는 "당시 순천경찰서 뒤뜰에는 주검이 쌓여갔고, 곳곳에서 주검이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손양원 목사는 누구인가?
산돌 손양원 목사(1902-1950)는 주기철 목사(1897-1944)와 함께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성직자이다. 사람들은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나환자들을 목회하면서 봉사의 삶을 산 그를 '성자'라고 불렀다. 또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 그의 행적을 두고 '사랑의 원자탄'이라고도 부른다. 이렇듯이 손양원 목사에게는 가족 중심주의를 뛰어넘는 인간애가 있었고, ‘자녀-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사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과 김은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19년 부친이 3.1운동에 가담한 일로 투옥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산 창신중학교에 편입했다. 이때 맥크레이(J.F.L.Macrae,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스가모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유학시절 동양선교회의 노방 전도에 큰 감명을 받고 이바다시 성결교회에 출석하던 중 나카타 주지 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중생 체험을 하였다.
21살 때인 1923년 말 귀국하여 부모가 정해 준 정양순과 결혼하고, 이듬 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학업을 마쳤다. 졸업하자 곧장 귀국하였으며, 이어 진주 경남성경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부산 감만동 나병원의 상애원교회에 근무하였다. 이때 호주 출신 매켄지(Noble Mackenzie) 선교사의 헌신적인 섬김을 보고, 동족으로서 나환자들을 돌봐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32년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교재로 하여 사경회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단으로 몰리면서 사임하게 되었다
1935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동안 수학하고 1938년 3월 졸업한 후, 부산지방 순회 전도사로 김해, 양산, 함안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7월 15일 전남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애양원교회 목회자로 부임했다. ‘애양원’은 1909년 미 남장로교선교부 소속으로 광주 제중원 원장이던 윌슨(R.M.wilson)이 10여 명의 나병환자를 수용하고 기부자의 이름을 딴 '비더울프 나환자 수용소'라고 불렀는데, 1925년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여수 앞 바다의 한적한 섬인 신풍으로 옮기게 되었다. 1936년에 이름을 지금의 애양원으로 고쳤다.
1939년 37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애양원교회 목회자로 부임한 손양원은 전 여생을 세상에서 버림받은 약 1천 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영혼의 목자'로 헌신했다. 어떤 글에는 손양원이 그때까지 사용하던 손연준이라는 이름을 애양원(愛養園)을 뜻하는 손양원(孫良源)으로 개명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한자도 다르거니와 설령 한글로 그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사실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상규 교수에 의하면 "칠원교회 교적부에는 손연준과 손양원 두 이름이 병기되었는데, 애양원 부임 이후 ‘양원’이란 이름을 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사(특히 한국교회사)에는 그와 같은 작위적인 역사인식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의 위대함은 그가 남긴 삶의 자취만으로도 충분하다.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옵소서”라는 글에는 나환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을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애양원에 남겨진 손양원 목사의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는 나병환자들의 희망이었고 기댈 언덕이었다. 아무리 중한 나병환자도 얼굴을 만지고 안아주면서 기도를 하였다. 병실이 더러울 때는 손수 방바닥을 맨손으로 치우고, 고름과 핏덩어리가 된 환자들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맞대고 울면서 기도하고 대화했으며 그 자리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심지어는 고름이 잘 빠지지 않는 나환자의 환부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야만 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성자(聖者)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양원에게는 목사의 직함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경남노회 부산지방 시찰회의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문에 목사 안수도 거부되었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은 무교회주의자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신사참배를 앞장 서서 반대하던 사람에게 안수를 줄 경우 일제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손양원이 1939년 애양원교회에 부임할 때도 목사가 아닌 조사 신분이었다. 그러나 애양원교회의 김응규 목사 후임자를 물색 중이던 원가리(Kelly J. Unger) 선교사는 손양원을 목회자로 청빙하면서 당회장권을 위임하고 목사라고 호칭했다. 당시 원가리 선교사는 그가 속한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노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안수를 받지 못하는 손양원을 목사로 인정한 것이다.
애양원교회 부임 후에도 손양원은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하게 거부하다가 1940년 9월 25일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광주형무소를 거쳐 청주보호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1945년 8월 17일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주님 고대가>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디어냈다. <주님 고대가>의 1절 가사이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 합니다 /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그런데 손양원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5년의 옥고를 치룬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이처럼 손양원에게는 신사참배 거부가 신앙적인 결단이지만, 역사가들은 항일 민족운동으로 보는 이유이다. 해방으로 출옥한 손양원은 다시 애양원교회로 돌아왔으며, 경남노회는 그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은 것이 잘못 되었음을 확인하고 1946년에 목사 안수를 허락하였다.
한편 손양원 목사가 체포되자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부산 범일동의 판자촌으로 옮겨 갔다. 학령기 자녀들은 학교를 포기한 채 일을 해야 했으며, 큰 딸 동희와 넷째 아들 동장은 구포에 있는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은 해방이 된 후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에 24살의 동인은 순천사범학교 6학년이었고, 19살의 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이었다.
10월 21일 좌익계열 학생들로 구성된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은 기독교는 친미적이라면서 기독학생들을 ‘반역죄’로 붙잡았다. 첫 번째 대상이 순천사범 기독학생회 회장이던 손동인이었고, 곧이어 손동신도 끌려왔다. 이들은 동인과 동신 형제를 마구잡이로 때린 뒤 순천경찰서 뒷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앞에 세워놓고 총살시키려 했다.
이때 동신이 형 동인의 앞을 가로막고 "형은 집을 돌봐야하니 살려주고 나만 죽이라"고 애원했지만, 그들은 동인을 쏴 죽였다. 동신은 자신에게 총부리가 겨눠진 상황에도 그들을 향해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 한다”며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나 곧이어 그도 총살당했다. 27일 애양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 손양원 목사는 ‘9가지의 감사문’을 읽었다. 첫 번째 감사가 자기와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을 순교자로 바칠 수 있는 축복을 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너무나 유명한《사랑의 원자탄》의 실화이다.
두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한 손양원은 크게 상심하였지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로 다짐하였다. 손양원은 구명운동을 통해 안재선을 석방시켰고, 그를 양자로 삼아 입적하였다.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앉았던 식탁에 그들을 죽인 재선을 앉히고 조반을 먹을 때, 내 입안에는 밥이 아니라 모래알이 삼켜진 듯 했다"라고 고백한 손양원 목사의 인간적인 고뇌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손양원 목사가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답사를 한 마지막 3가지 감사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양자 삼고자 하는마음 주신 것을 감사하고, 아들의 순교가 열매 맺어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니 감사하고,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 주시니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백범 김구는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이라며 감동하였다.
손양원 목사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위 사람들은 피난을 갈 것을 권유했지만 손양원 목사는 거절하였다. 교회도 지켜야 하지만, 병이 들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나환자들을 두고 혼자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에 피난처가 어디 있는가! 피난처는 오직 주님 품뿐이다”며 피난을 거절했다. 그는 “나마저 도망가면 누가 나환자들의 벗이 되겠느냐”고 반문하고 피하지 않았는데, 7월 27일 여수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애양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던 그는 공산당원에게 끌려갔고, 9월 28일 밤 순천으로 옮겨가던 중 미평(美坪)의 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이로써 손양원 목사는 48년 간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두 아들을 따라 순교자의 길을 갔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보름이 지난 10월 13일에 고려고등성경학교장 오정덕 목사의 집례와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목사의 설교로 장례식이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가 양자로 삼은 안재선이 상주의 자리를 지켰다.
이어 10월 29일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그의 추모 예배가 열렸을 때, 설교자인 박형룡 목사는 “손양원 목사는 위대한 경건인이요, 전도자요, 신앙의 용사요, 나환자의 친구요, 원수를 사랑한 자요, 성자이다”라고 칭송했다. 이처럼 그의 거룩하고 위대한 삶을 안용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5년 동안의 옥고를 치른 손양원 목사의 행적을 기려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순사건과 손양원 목사 부자의 순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21년 대한민국은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의 대립으로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시행을 앞둔 '여순 사건 특별법' 제정은 또 다른 갈등의 불씨이다.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좌익 혐의자들의 목을 치고 다녔던 식인호랑이 김종원을 위시한 진압군들과 복수심에 눈이 뒤집힌 경찰들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잔인의 극치를 달렸다. 따라서 이때 국가 폭력으로부터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을 가려내서 보상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꼭 집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정확한 성격 규명이다. 여순사건의 본질은 제14연대 안의 남로당 당원들이 제주도로 출동을 거부한 군사 반란 사건이다.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가 없어서 봉기했다”는 변호로 성격을 호도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이다.
둘째, 정확한 사실 규명이다.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양민은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지만, '항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이들에게 먼저 학살을 가한 것은 좌익 반란군이었고, 나중의 학살은 복수심에 이성을 잃은 군경이었다. 균형감 있는 진상 조사가 필수적인 이유이다.
셋째, 분명한 방향 설정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국가가 판정한 사건을 진보정권이 재조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특별법을 제정하려면 분명한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여순사건의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통해 사회 통합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은 손양원 목사의 용서와 화해 정신에 기초해야 한다. 그의 원수 사랑은 살인자 안재선에게 새 삶을 선사했고, 양 손자인 안경선은 목사가 되어 아프리카 브룬디의 한센병 환우들을 돕기 위한 NGO '손 사랑브릿지'를 통한 사랑의 걸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순천 출신의 조정래 작가가 쓴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었고, '운동권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 책을 통해 서서히 재평가되는 수순을 밟았다. 그 결과 선과 악이 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는 혼란을 겪고 있다. 지난 시기 역사의 아픔은 치유하되, 역사적 교훈은 잊지 않는 슬기로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형석 박사(전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김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