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하나는 자신 있던 평양 토박이 탈북 여성이 ‘목회자’가 됐다. 주인공은 탈북 목회자 유일의 ‘가정교회’인 샬롬능력순복음교회 이에스더 전도사다. 비록 집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곳에는 매 주일마다 20-30명이 북적댄다. 이 땅의 2만 5천 탈북자들 모두가 통일 후 ‘원주민 선교사’라 강조하는 이 전도사는 ‘사회복지’와 ‘다음세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으로 와서 신학을 하게 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1997년 탈북해서 중국엘 가서 한족 교회를 2년 반 다녔고, 세례도 받았어요. 하지만 신학공부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북한에 남은 우리 애들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렇게만 해 주시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했는데, 그게 서원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웃음). 5개 나라를 돌아다니다 천신만고 끝에 2001년 한국으로 오게 돼 부산에 정착했습니다.
한국 와서도 가족들이 눈에 밟혀서 정말… 의지할 곳은 기도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비록 저는 7년간 아이들을 몸부림치면서 그리워했지만, 그건 제 사정이고, 하나님은 단번에 하시더라고요. 중국에서 사스(SARS)가 창궐했을 때 아이들이 탈북해 북경까지 곧장 왔어요. 마치 가는 곳마다 택시가 대기하는 것처럼… ‘비행기로 오면 돈이 많이 드니 그저 하나님 ‘빽’으로 인도해 주세요’ 하고 45일 죽어라 기도했을 뿐인데, 저희는 브로커 비용도 내지 않고 곧 대사관으로 들어가서 곧 한국으로 왔어요.
가족들과 함께한 후 4년간 살던 부산 집은 좁아서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서울에 오니 탈북자들이 다 NGO 굿피플에서 하는 자유시민대학에 다니고 있길래 저도 입학했지요. 한국 정착을 돕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배우면서 신앙도 보살펴주는 곳인데, 포장마차 하려고 외대 앞 토스트가게에서 3개월 실습도 마쳤어요. 제가 평양에서도 장사를 했었거든요. 여기로 말하면 백화점 정도 되는 곳에서 ‘판매원’을 하다 왔습니다. 여기 와서는 미용사 자격증도 따면서 열심히 살았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계속 ‘준비하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무엇을 하라는 건지 모르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치심을 느꼈어요. 막 몸이 너무 아픈데 병원에 가면 병명도 안 나왔어요. 그런데 예배 시간에 조용기 목사님께서 ‘불순종하는 사람은 회개하고 빨리 한세대로 가라’고 하시는 거에요. 너무 놀랐어요. 그래서 등록하고 나니, 어느새 통증도 없어졌고요. 자유시민대학 분들도 후원해 주셔서 토스트가게 오픈하려다, 신학 공부를 시작한 거죠(웃음). 그리고 뒤돌아볼 시간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 아이들 만나자마자 죽을 순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전도사님을 부르셨고, 무엇 때문에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하는지요.
“저는 이 땅에 온 탈북자들 모두가 ‘원주민에 대한 선교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저희를 먼저 부르셨다는 거죠. 저희가 남아있는 이들보다 나아서 부르신 게 아닌 걸 알아요. 두만강 물에 빠져죽은 이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러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께서 데려오신 귀한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설교하면 늘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통일이 되면 북한으로 올라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라고요.
7년간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힘들고 지쳤지만, 지나고 보면 그러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세상에서 방황하고 타락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북한도 대한민국 못지 않게 복음의 땅이 되길 원하시지 않겠어요? 한국교회가 전세계로 나가서 전도하고 있는데, 유독 북한에만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북자들을 부르신 것은 ‘통일의 예행연습’입니다. 탈북자 2만 5천명에게도 복음을 심지 못하는데, 어떻게 2500만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어요? 우리가 여기서 철저히 주님을 만나, 저 땅에 가서 이 복음을 나눠줘야죠.”
-우여곡절 끝에 들어가신 신학교 시절에 대해 듣고 싶어지네요.
“한세대에서 4년, 순복음목회대학원 2년까지 6년간 배웠어요. 자유시민대학까지 하면 7년이죠. 특히 자유시민대학 때가 기억에 남아요. ‘치유캠프’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만지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어떤가를 거기서 깊이 느꼈어요.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졌고, 맨 앞에서 예배드리고 싶어 아침 일찍 나갔어요. 계단에서 기다리면서부터 감사해서 막 흐느끼니 다른 탈북자들이 사정도 모르고 ‘자기만 북한에 부모형제 있나’ 하기도 했어요(웃음). 너무 좋아서 1부부터 5부까지 계속 앉아 예배드렸어요.
저는 한세대가 신학대학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일반 과정도 있었어요. 신학부 시절에는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데, 성경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대신 초대교회와 인물, 교리 같은 걸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더 잘 알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 적도 있었죠. 이런 생각으로 잠깐 방황도 했지만,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구나 생각했어요.”
-사회복지를 복수전공으로 공부하셨죠.
“교양 과목부터 사회복지를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지 알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이 사춘기 때 한국으로 왔는데, 북한에서 하던대로 살면 바로 교도소에 가겠더라구요. 북한에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잘 치고받고 때리고 싸우는 일이 많아요. 부모들도 때리는 걸 하나의 교육으로 알고 있죠. 아이들이 여기서도 그런 방식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비위가 조금 맞지 않으면 주먹부터 나왔죠. 특히 부모 없이 넘어온 탈북 아이들은 10년 가까이 그렇게 사니까 말도 듣지 않고, 관리가 안 됐어요.
그래서 사회복지를 배우면서 특히 청소년 또래들과 교제를 잘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집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할 때였는데, 탈북 친구들에게는 그냥 먹도록 했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친구들 데려오게 해서 삼겹살 파티도 해 줬어요. 절대 그냥은 안 보내고, 뭐든 계속 먹여줬죠. 그러면서 ‘청소년 사역을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청소년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셨어요.”
-청소년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셨군요.
“한국교회에서 북한 사역 많이 한다고들 하시지만, 가장 필요한 건 탈북자들 중에서도 사춘기 아이들을 위한 사역입니다. 이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는데도, 비용이 많이 드니 알면서 외면하고 투자를 하지 않으세요. 그러다가 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바로 장학금까지 줘 가면서 데려가곤 하죠. 이런 부분들을 놓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다른 누구를 찾지 말고, 네가 엄마가 되어주면 어떻겠니’ 라고 하셨어요. 그때 그 마음으로 ‘하나님, 제가 준비된다면 하겠습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기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무연고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만드는 게 비전입니다. 교회와 쉼터를 같이 하면서 정처없이 떠돌고 있는 탈북 청소년들을 돌보려고요. 중국에서 올 꽃제비들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합니다. 사실 한국 분들은 그 아이들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역에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아이들은 마음에 깨기 힘든 얼음덩이가 있어요. 시한폭탄를 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도 청소년들, 청년들이 많이 찾아와요. 불순종하던 저 같은 사람이라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성도 10-20명이 출석하는 이에스더 전도사의 샬롬능력순복음교회에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20-30명씩 나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 감소 현상으로 심각한 위기라지만, 이곳은 정반대인 것.
-교회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탈북자 가정들이 바로 서서 모두 모델 가정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가정이 우선 회복되어야 하고, 이들을 북한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도록 만들어야죠. 저희 교회 출석하는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같은 지역 출신이 없어요. 각 도 출신들이 모두 있는데, 평신도 사역자든 목회자이든 이들이 도마다 리더로 세워지는 것이 비전입니다.
탈북 청소년들에게는 쉼터와 교회를 통해 남북한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우리가 저 땅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며,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북한에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주고 신앙으로 사랑으로 품어주고자 합니다. 남한 아이들에게는 ‘너희들까지 탈북 아이들을 차별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겠냐’고 호소할 거에요. 이들이 10-20년 후면 모두 이 나라 통일한국의 주역이잖아요. 저희 교회는 남북 사람들이 같이 예배드리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애들은 남북이 따로 없어요(웃음).”
-자녀들이 집이 교회인 걸 싫어하진 않나요.
“아니요. 더 좋아해요.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얘기합니다(웃음). 아직 준비 과정이니, 하나님의 때가 되면 교회가 생길 거라 믿어요.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기저기 손 벌려서 개척할 순 있겠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해뒀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 문을 열어주시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탈북민 목회자들 중에 가정에서 교회 하는 사람은 저 뿐이라 고민도 했지만, 그게 정답 같아요.”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가정만 봐도, 하나님은 단번에 하시는 분이세요. 통일은 하나님께서 더 급하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철 없는 아기에게 칼을 쥐어줄 순 없듯, 우리가 충분히 준비됐느냐입니다. 남북의 문을 열어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질 때, 이 땅에 와 있는 탈북민 2만 5천명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고 준비됐을 때, 결국 하나님 계획에 달린 것이지요. 저는 통일이 되면 탈북자들이 일선에 서리라 장담합니다. 탈북민은 원주민 선교사이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 관점에서는 정말 귀한 분들이십니다. 북한 돕기 한다고들 하시지만, 우리 곁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때, 무엇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까요.
“저도 처음엔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의식이 심했기 때문에, 그걸 내려놓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하나님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왜 북한을 저 모양으로 내버려 두시는가?’ 그런 질문들이 생겼죠.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강 건너 중국이랑 대한민국은 그렇게 잘 살게 하시고 북한은 모두 굶어 죽어가는데도 모른 척하시는가?’ 그게 제일 가슴 아팠고 믿어지질 않았습니다. 믿으려는 마음조차 생기질 않았던 거죠. 하지만 중국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곤 바뀌었죠.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 앞에서 붙잡혔던 적이 있는데, 잡히면 부모 형제까지 다 쫓겨나게 생겼으니 감옥에서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기도만 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건 여기 탈북자들이 어떻게 준비되느냐에 달렸어요. 얼굴 모르는 한국인들이 가서 전하는 것보다, 동네 주민들이 얼굴 다 아는 제가 영권 물권이 다 채워진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더 좋을거라 봅니다. 전도는 관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각 도마다 리더를 세우고 싶다고 했는데, 저는 평양 출신이에요. 평양에 교회가 3천곳이나 됐다고 하더라고요. 평양은 제게 맡겨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웃음).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갈 거냐 말 거냐 말이 많은데, 당연히 가야죠. 그땐 몰랐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걸 말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눈 뜨고 그걸 볼 수 있나요?”
-꼭 하고 싶은 말씀이 더 있으시다면.
“특히 부모 없이 혼자 있는 탈북 청소년들을 많이 위로해 주시고, 한 마디라도 사랑으로 건네 주시면 좋겠어요. 다른 건 모르겠고 탈북 아이들은 엄마가 되어주면 되더라구요. 그러면 엄마한테도 못 하는 이야기를 저한테 해요(웃음).
그렇게 탈북민들이나 탈북민 교회에 관심 많이 가져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한만두식품 남미경 대표님이나 일산자애병원 이원희 원장님 부부, 강남약수센터 중보기도팀 신혜숙·안숙향 목사님,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님 등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교회를 위해서는 성전을 구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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