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순 목사
박재순 목사

생각, 나는 생각, 하는 생각, 이성과 영성의 통합

생각하는 인간 homo sapiens: 생각과 실천의 통합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화려한 동영상이 넘쳐나니까 보고 듣는 것은 익숙해지는데 생각하는 것은 낯설고 멀어진다. 더욱이 돈이 지배하고 서로 경쟁을 강요하는 시장경제 체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오랜 생명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보고 듣는 존재에서 생각하는 존재로 진화했는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울긋불긋하고 번쩍번쩍하는 것에 홀려서, 돈의 위력에 눌려서 인류는 다시 보고 듣는 존재로 돌아갔다. 현대인은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보고 듣는 존재이다. homo sapiens가 아니라 homo videns, homo audiens이다.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약해지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위기이며, 문명적 위기이다. 모든 문명의 기초는 정신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아무리 강력하고 거대한 국가와 문명도 무너진다. 물질문명이 화려하고 기계기술문명이 찬란할수록 생각과 영성이 깊어져야 한다. 그래야 문명이 지탱된다. 신과학자이며 문명비평가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감각적인 물질문명이 황혼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은 화려해보이지만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도 생각을 깊이 파야 한다. 인류평화의 새 문명을 지으려면 정신과 생각이 깊어져야 한다.

생각의 근원: 생각은 사랑에서 나온 것

물질문명에 취한 현대인들은 정신과 생각에 대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동안 물질과 사회제도의 관점에서 인간과 역사를 이해하였다. 흔히 사회과학자들이 “먹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를 알 수 있고 사회적 존재를 알면 그 사람의 정신과 의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도 말한다. 가난한 자와 부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의 의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자가 정의와 평등을 생각하기 어렵고 가난한 자가 법과 질서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을 알면 사람을 알 수 있다. 생각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고 존재가 결정된다. 평상시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사람의 존재가 결정된다. 생각하는 대로 살고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 생각과 존재가 일치한다.

본래 생각은 삶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생명체와 정신적 존재는 스스로 움직이고 의식하는 주체를 가지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라는 점에서 낮은 단계의 지향(의지)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 개나 소도 감정을 가지고 반응한다. 생각은 생명체의 이러한 주체적 의식에서 나왔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 이성적 존재(homo sapiens)라 하여 다른 동물과 구별한다. 생각은 구체적인 사물과 대상에 대한 지각과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과는 구별된다. 다른 동물들의 의식과 지능은 본능적 욕망과 그 대상에 매여 있다. 구체적인 상황, 물질과 대상에 직접 즉자적으로 대응한다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심리적 본능, 물질적 대상, 기계는 주어진 법칙과 틀을 따라 움직인다. 생각은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모르는 것, 새로운 것을 알려고 헤아리며 애쓰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어서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자기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가능해진다. 본능적 욕망에 매이면 꾀(지능)는 늘어도 생각은 할 수 없다. 다른 동물들도 생존본능에 봉사하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지능은 생각함으로써 발달했지만 본능적 욕구에 충실하다. 생각은 자기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물질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이성적 생각은 본능과 영성 사이에 있다.

기계가 발달하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지능을 갖게 될 것이다. 계산능력이나 추리능력에서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영혼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예배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기계는 아무리 해도 자동적인 것이지 자발적 헌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가. 왜 인간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함석헌은 신의 사랑이 생명진화와 역사 창조의 동인이라고 보았다. 포유류가 생명체를 몸 안에 품고 오래 지내면서 생명체를 먹이고 돌보는 과정에서 지성과 감성이 생겨났다고 한다.

인류학자들과 진화학자들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치유하고 돌보는 과정에서 남을 헤아리는 데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자기만 살려고 할 경우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기의 생존을 위한 필요를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생존을 위한 필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헤아리고 생각해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로 생각하고 서로 자기를 표현하는데서 인간의 본질이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눈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흰자위가 있다. 흰자위는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드러내기 때문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사람은 서로 자신을 드러내는 눈을 보면서 서로 교감하고 사귀며 연대함으로써 생존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흰자위가 생긴 것은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살리고 돌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 믿음이 인류를 낳았다.

생각의 근원은 사랑이다. 중세 이전의 한국어에서는 ‘사랑하다’가 생각하다를 뜻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긴 병을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사랑과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고 본다.

마음이 수 천 만년, 수 억 년 빚어낸 몸의 기관들과 세포들, 창자, 자궁, 간, 허파, 염통, 혈관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마음이 담겨진 몸의 이런 기관들에서 생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모든 언어들에서 히브리어, 한국어에서도 몸의 기관들이 생각과 감정의 자리였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애를 끊는다. 애간장이 녹는다.” 그리스어에서 스프랑크니조마이는 “연민을 느끼다.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느끼다.”는 뜻인데 어원은 자궁, 창자를 뜻한다.

원시시대에는 몸과 몸의 각 기관들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자리이고 주체였다. 창자와 자궁이 아픔과 사랑을 느끼고 생각하는 자리이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몸으로도 생각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굶주린 창자가 지식인의 머리보다 더 예민하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손으로 일할 때 손도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 있다고 본다. 책을 통해서만 배울 것이 아니라 일하는 손을 통해서 삶과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예수는 손으로 일하면서 생각하고 많이 배웠을 것이다. 사랑으로 섬기는 손과 발에서 삶의 지혜가 나온다.

니체도 ‘육체의 대이성’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머릿속의 이성보다 몸의 이성이 더 근원적이고 크다는 것이다. 몸은 우주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오늘날 몸의 생각과 인식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지성에 의해 본능적 욕망이 과장되고 왜곡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러움을 잃었다. 인간의 식욕이나 성욕은 몸의 필요를 벗어나 크게 과장되어 있다. 또 지성은 생각을 관념화시킴으로써 사랑과 삶에서 생각을 분리시켰다. 몸의 대 이성이 회복되고 완성되려면 이성과 영성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지성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된 본능적 물질적 욕구에서 이성이 벗어나 영성과 통합이 될 때 몸과 이성과 영성의 대통합에 이를 것이다.

함석헌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대 병원에 계실 때 내게 말씀하셨다. “큰 공부를 하시오. 사람에게 본능과 이성과 영성이 있는데 본능과 이성을 넘어서 영성을 아우르는 공부가 큰 공부입니다.” 영성과 통합된 사유, 생각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사유이며, 생각과 실천이 결합된 사유이다. 오늘날 학문이 개념과 논리에 충실한 논문을 쓰는 것에 머물러 있고 실천과 유리되어 추상적 난해함과 관념적 유희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본래 동양에서는 학문과 삶, 실천이 통합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경우에도 지행합일, 사유와 실천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근대과학철학과 함께 사유와 실천이 분리되고 학문이 관념과 논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오늘 인문학의 위기는 사유와 실천의 분리에서 왔다. 오늘의 학문에서 생각과 실천, 생각과 삶이 유리되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유리되고 외면당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사유와 실천이 통합되고 영성적 사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귀감이 된다. 최근에 김 상봉 교수가 남미에서 '함석헌의 인간관'에 대해서 발표를 했는데 오스트리아 철학교수가 “어떻게 이런 사람의 글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함석헌을 “20세기의 소크라테스”라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유와 실천이 통합되었고, 표현이 소박하면서 깊이가 있고, 정해진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도전적인 질문을 통해서 삶의 결단과 실천을 통해 진실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함석헌과 소크라테스가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노예제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에게 대화와 토론을 통해 철학을 가르친 것과는 달리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으로서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철학과 실천을 추구했으며, 동서정신문화를 통합하는 사상과 철학을 형성했다.

본래 몸의 진화와 의식의 진화가 함께 갔을 것이다. 의식의 진화가 몸의 진화를 이끌어 갔을 것이다. 의식의 진화와 몸의 진화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진행되다가 생각하는 인간이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고운 꽃과 아름다운 단풍을 보는데 사람이 보는 것과 벌레나 곤충이 보는 것이 다르고 개나 소가 보는 것이 다르다. 벌레나 다른 짐승은 사람처럼 섬세하고 고운 빛깔의 꽃 모습을 못 본다. 마음, 의식이 발달한 만큼 눈의 감각기관이 섬세하게 발달해서 예쁜 꽃을 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더 발달하면 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의 의식이 눈의 감각기관을 빚어내고 눈이 꽃을 보는 것이라면 고운 꽃은 마음이 빚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예수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낚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낚아야 한다. 함석헌은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깊은 명상의 바다에서 생명의 바다에서 생각을 낚았다. 寂然不動, 感而遂通 싱싱한 펄떡거리는 생선과 같은 생각을 낚으면 그것이 ‘참 나’라고 했다. ‘나’를 낚으면 참 기쁘다고 한다. 생각으로 생각을 낚는 것이다. 이렇게 낚은 나는 민족의 생명의 바다, 민중의 생명의 바다, 인류정신의 깊은 바다, 우주의 생명바다에서 영원히 사는 나이다. 고정된 실체도 가면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 영혼이며 하나님과 하나로 통한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이다. 이런 생각을 낚으면 몸과 맘이 살아난다.

영성과 통한 생각은 뚫린 생각이다. 도통, 감이수통이다. 하늘과 땅, 몸과 정신, 동서고금,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뚫린다. 사람은 뚫려야 한다

사람의 몸은 식도로부터 항문까지 뚫려 있다. 그 중간 어디가 막히면 몸에 이상이 생겨 신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확 뚫려 있어야 한다. 어디가 막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꼭 막힌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속이 확 뚫린 사람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퉁소 같은 사람이다.(함석헌의 강연에서)

몸이 두루 뚫리고 통하듯이 마음과 생각도 두루 뚫리고 통해야 한다. 함석헌은 생각과 실천, 정신과 몸이 하나로 뚫리는 삶을 추구했다. 동서고금의 사상과 정신이 하나로 뚫리고 나와 너와 그가 하나로 통하며, 우리와 원수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자리에 이르려 했다. 하나로 뚫리고 통하면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세계화 시대에 세계평화, 비폭력 평화의 새 시대가 온다. 기존의 국가문명은 돈과 칼, 물질의 지배를 받고 이성은 물질의 지배에 종속되었다. 이제 이성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성이 해방되어 제 구실을 하려면 영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이성은 본래 객관적 보편적 우주적 진리를 탐구하자는 것인데 돈과 칼, 물욕에 종속되어 제 구실을 못했다. 이성이 제 구실을 다 하고 영성에 봉사하면 비폭력 평화의 시대를 당겨 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하는 정신 쪽으로 방향을 크고 힘차게 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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