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전염병이 잦아들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전염병과 주일성수 및 공예배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웃 사랑과 종교간 대화를 부르짖는 종교혼합주의, 다원주의가 ‘상황윤리’를 앞세워 기독교윤리를 무너뜨리던 중에 이제는 주일성수와 공예배까지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는 더욱 위급하다. 더구나 동료 기독교인들이 전염병 중에 모이는 공예배를 지키는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반역’을 행하는 것이라는 거친 말들을 쏟아낼 정도로 공예배 개념이 무너져 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부득이한 상황이니 모이는 공예배나 모이지 않는 공예배 양쪽 모두 존중하자라고 중립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물론 중립적인 신앙의 주제들은 각 교단마다, 개인마다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주일성수와 모이는 공예배와 성례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라는 말씀처럼 중립적인 주제가 아니라 영원하고 절대적인 명령이며, 거룩한 언약이요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21문에서 “안식일은 칠일 중에 단 한 번만 오고 여러 가지 세상의 일들이 그 사이에 오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은 이 날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빼앗겨 이 날을 준비하거나 이 날을 거룩히 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 그리고 사단은 그의 도구들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이 날의 영광을 지워 버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여 모든 불신앙과 불경건을 초래하기 때문에 ‘기억하라’고 하신다.라고 경고하듯이 주일성수는 우리의 나태한 죄악과 사단의 다양한 공격 때문에 항상 소홀해지거나 등한시 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모이는 공예배 폐쇄나 변경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와 같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는 더욱 개인의 주관적 성경해석을 강조하지 말고 교회가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공적인 해석을 살펴봐야 한다. 앞선 교회들도 이미 우리와 비슷한 전염병과 같은 상황에서 주일성수와 공예배의 성경적 입장을 충분히 고민했기 때문이다. 우선 제네바 교리문답에서는 아래와 같이 모이는 공예배를 강조한다.
“305문: 교회의 공적 집회에 참석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한 수단도 제공해 주셨습니다.”
“306문: 교회의 공적집회에 꼭 참석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이 질서를 세워 놓으신 것은 두 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교회의 모든 성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이것만이 성도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질서를 고수해야 합니다.”
칼빈시대에도 재세례파를 중심으로 형식을 갖추어 모이는 공예배를 비판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삶의 예배’로, ‘무형식주의’로를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이는 공적집회를 비판하며 개인의 신앙고백과 삶의 변화를 강조했고, 개인의 성경읽기와 경건생활을 공적인 설교보다 더 강조했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공적인 설교의 중요성과 모이는 공적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런 형태가 예수님이 세워주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지혜로움’이나 ‘부득이함’을 핑계로 이 질서를 변형시키지 말도록 충고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103문에서 4계명을 해설하면서 “첫째, 복음전파와 복음에 관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며 특별히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라고 정리하였다. 즉, 성도들의 경건생활은 주일에 정규적으로 모이는 공적 예배를 통해서 세워지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 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다뤄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다. 오늘날 모이는 공예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신앙은 건물중심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표현은 신앙본질을 설명할 때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니까 모이는 형태의 예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논리적 비약을 제기한다. 그러나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22장. 교회의 집회에 관하여’에서 시간과 공간이 성도의 경건생활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자세히 성경적으로 설명했다.
“누구나가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피차간에 교훈을 통해서 참된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일이나 종교적 집회가 꼭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절히 설교되어야 하고, 기도와 간구가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성례전이 옳게 베풀어져야 하고, 가난한 자들과 교회의 경비를 위해서 헌금이 모아져야 하고, 사회적 사귐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모임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회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와 같은 모임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와 같은 모임을 멀리하는 사람은 참 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들과 신앙이 있는 관원들은 이들을 권고하여 그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도록 권고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모임들은 비밀리에 회집되거나 은밀히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교회의 원수들이 박해하는 이유로 교회의 모임들이 공적으로 모이지 못한 것을 예외로 한다면 교회의 모임들은 항상 공개적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라도 출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황제의 폭군정치 치하에서 초대교회의 집회가 어떻게 비밀한 장소에서 일어났는가를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는 품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적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건물이나 장소를 택하되 교회를 위해서 적합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모든 내부장치는 단정하고 품위 있게 배열되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을 적합한 장소에 놓아야 한다. 예배와 교회의 꼭 필요한 기능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꼭 있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거하시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헌납된 장소들이 속된 것이 아니요,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요, 그 장소들이 거룩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장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의 현존과 더불어 거룩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점잖고 정숙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 신앙고백서도 칼빈의 교리문답처럼 개인의 경건생활을 핑계로 모이는 공적예배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엄히 충고하며, 모임들은 공적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열심히 모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비록 우리는 로마 가톨릭처럼 건물중심 신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세례파처럼 어떤 모임과 형식도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유형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품위 있는 예배장소가 필요하고, 또한 교회의 모임들에서 우리는 정숙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24장. 거룩한 날들에 관하여”에서도 “종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배양시키고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시간의 적절한 배열과 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공중기도와 복음의 설교와 성례전의 집례를 위해서 적당한 시간을 선택한다. 아무도 교회가 정한 시간들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종교생활을 위해서 시간과 힘을 할애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틀림없이 종교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말 것이다.”라고 고백하여 구별된 예배시간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다.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서약을 하고 직분을 맡을 정도로 이 표준문서는 장로교인들의 신앙규범이며, 교회정치의 규준이다. 이 표준문서에서 모이는 공적예배는 신적명령이기에 당회가 함부로 폐쇄하거나 변경하는 것을 주의해야하고 명령된 대로 엄숙하게 모여서 예배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모이는 자세와 태도 하나하나까지 설명하여 회중의 모임과 하나님께 대한 공적 예배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하고 경건해야 하는지를 제기했다. 그리고 공적으로 모이는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라고까지 하여 가장 영광스러운 경건의 시간과 공간임을 강조했다.
“회중이 공적 예배를 위하여 모일 때, 백성들은 그 장소에 참여하기 위하여 미리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고 모두 나와서 함께 참여해야만 한다. 무관심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거나 사사로운 모임을 구실로 공적인 규례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예배당에 들어가되 불경건하게 말고 엄숙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들어가고 이곳저곳을 향하여 예배하거나 절하지 말고 자리를 잡거나 제자리에 앉는다. 회중이 다 모이면, 목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이름을 예배하자고 엄숙하게 요구한 후에, 다음과 같은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경건과 겸손으로 주님의 무한한 위대성과 위엄을 인정하고, 반면에 우리 자신의 악함과 주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는 무자격을 인정하고,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예배하기 위해서 특별한 태도로 나온다. 더불어 그러한 위대한 예배를 해낼 수 없는 저희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한 후 겸손히 용서를 간구하고, 이제 드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마다 용서하시고 도와주시고 받아 주시며, 그때 낭독되어질 그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에 복 주실 것을 겸손히 간구하고, 이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중보로 기도할 것이다.”
“공적 예배가 시작되면, 회중은 전적으로 예배에 주의를 기울여서 목사가 그때 읽거나 인용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읽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개인적인 속삭임, 대화, 인사나, 거기 참석한 사람이나 늦게 들어오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행동을 더욱더 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멍하니 바라보거나 잠자거나 그런 보기 흉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행동은 목사나 회중에게 폐를 끼치고 그들 자신이나 남들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부득이하여 예배에 처음부터 참석하지 못했으면,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고, 그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규례에 회중과 함께 예배드려야 한다.”
지금까지의 장로교 신앙고백서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시간에 있어서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있으며, 장소에 있어서 ‘모이는 공예배’를 철저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의 내적인 본질은 반드시 외적인 신앙고백과 예배의 정규적 형식을 통해서 자라가고 세워진다(롬10:10). 둘 중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안 된다. 이 입장이 신구약 전체에서 명령하는 주일성수와 공예배에 대한 공적 해석이다. 따라서 당회는 모이는 공예배를 폐쇄하거나 변경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물론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위험한 때에 성도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이웃사랑을 협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제 2스위스 신앙고백도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교회의 원수들이 박해하는 이유로 교회의 모임들이 공적으로 모이지 못한 것을 예외로 한다면 교회의 모임들은 항상 공개적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라도 출석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고백하여 ‘부득이함’을 인정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모이는 공예배를 중단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주의해서 말해야 한다. 따라서 주일성수와 공예배에 대한 교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일성수와 모이는 공예배는 신앙의 본질이며, 기독교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함부로 폐쇄하거나 변경하면 안 된다. 더구나 당회가 국가와 교회의 상황을 충분히 살피지 않고 선제적으로, 우선적으로 공예배를 폐쇄하면 예배를 거부한 죄에 빠질 수 있다.
둘째,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특수한 부득이함은 아주 예외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다만 모이는 공예배가 훼손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며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폐쇄와 변경에 대한 정당한 섭리적 이유가 확보되지 않으면 예배를 무시한 죄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부득이함을 적용해 주어 배려할 수 있다.
셋째, 어떤 경우라도 모이는 공예배를 절대 폐쇄할 수 없다와 부득이하니 빨리 폐쇄해야 한다는 모두 잘못된 입장이다.
넷째, 공예배 폐쇄나 변경 시에는 정당한 섭리적 이유가 명확해야 하고, 순서적 적용이 있어야 한다. ① 우선 환자, 노약자, 유아 등 연약한 성도의 개인적 피신, ② 국가의 공무적 판단(위험 단계 공고)에 맞춰서 적용-주의단계, 재난지역 선포나 셧다운처럼 이동중지명령 공표 등에 맞춰서 적용, ③ 가장 위험한 단계에서는 공적 모임 장소를 이동하거나 변경한다.
전염병에서 대구처럼 위험한 상태라면 온라인 형태로 공적 모임을 변경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 경기처럼 아직까지는 재난지역도 아니고, 7대 방역 수칙이라는 가이드라인까지 국가에서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선제적으로 모이는 공예배를 폐쇄한 것은 ‘예배거부죄’에 해당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배거부죄’와 ‘부득이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본인은 ‘부득이함’이라고 우기지만 하나님의 판단에 ‘예배거부죄’로 비춰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책망이 벌어진다.
종교개혁 역사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당회가 위험 속에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돌보며 모이는 공적 예배를 지켜내라고 당부한다. 이 일은 위험한 일이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목사와 장로는 이 일을 위해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성경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5:17)라고 이들을 존경하라고 말씀한다. 당회는 선제적으로 공예배를 폐쇄하고 변경할 것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에 최후의 수단으로 결정해야 한다. 교회의 당회와 성도들이여!, 주일성수와 모이는 공예배를 사랑하고 지켜냅시다.
신원균 목사(분당한마음개혁교회, 대신총회신학연구원(조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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