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태 박사(개신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

[기독일보] 개역성경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정복 작전 중에 아간은 '바친 물건'을 취하여 망령된 일을 행 한자로 정죄되어 아간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이 처참하게 돌로 맞아 죽고, 사람들은 그들의 시체 위에 돌을 쌓았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 '바친 물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바친 물건'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는 헤렘((jrm)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헤렘((jrm))은 고대 근동 세계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신의 명령으로 전쟁에 나가 싸울 때, 그들이 정복한 성읍을 진멸함으로 그 성읍을 그들의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이다. 신들이 그 전쟁을 이끌고, 그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는 전쟁의 사령관이기 때문에,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이나 노략물은 마땅히 그들의 신의 것이다(수 6:24). 따라서 사람이 그 전리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로지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에 이 거룩한 전쟁에서 사람이 그 전리품을 착복하거나 손을 댄다면 그는 신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될 것이고,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신성 모독자가 될 것이다. 단순한 절도범이나 도적이 아니다. 그래서 이 물건을 사람이 손대지 못하도록 신들은 그 성읍이나 전리품을 다 진멸하도록 명한다. 전리품이나 노략물을 진멸함으로 실상은 여호와께 바침이 되는 물건이 바로 헤렘이다.

우리 한국이나 서양 세계에는 이러한 풍습이 없다. 따라서 이것을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영어에서는 이것을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금기'의 의미로 'taboo'나 'ban' 혹은 '진멸하기 위하여 바쳐진 물건'이라는 뜻으로 'devoted to destruction'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도 '진멸하여 드리는 제사'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다같이 헤렘의 본래적인 의미를 다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헤렘을 제사라고 볼 수는 없다. 개역 성경의 '바친 물건'이라는 말은 더욱 그렇다. '진멸해야 할 물건'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헤렘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여호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이다. 따라서 사람이 헤렘에 손대면 안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6:18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오직 너희는 진멸할 것으로부터 스스로 주의하여라. 그렇지 않고 너희가 진멸할 때 진멸할 것을 취하면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진멸할 것이 되게 하고 그곳에 고통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헤렘을 범하면, 그 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진영이 헤렘, 곧 진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수 6:18).

여호수아서에서는 이러한 헤렘 명령을 여호와의 언약으로 이해하고 있다. 수 7:11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이성 정복에 패하고 엎드려 있는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어찌하여 네가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였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고, 진멸할 것을 취하여 도둑질을 하였으며, 속였고, 심지어 그것들을 자기들의 물건 가운데 두었다" 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헤렘을 범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불태워야 할 것이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어리석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수 7:15)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헤렘을 범하는 경우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는 것이 되어 언약적 저주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 언약으로 여호와께서는 왕으로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전쟁에 나아가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워 여리고 정복 전쟁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언약관계 때문이다.

아간은 여리고 성읍을 정복할 때 헤렘을 범하였다. 그는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그리고 오십 세겔짜리 금덩이를 착복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할 물건에 손을 대었으므로 그들은 아이성 사람들 앞에서 대항할 수 없었고, 그들 앞에서 등을 돌려야 했다. "이는 그들 스스로 진멸할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수 7:12).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진상 조사를 하게 되었고, 여호수아는 아간의 범죄를 밝혀낼 수 있었다. 헤렘의 벌칙대로 아간은 그의 가족과 더불어 아골 골짜기에서 처형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언약적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는 여호와의 언약과 말씀에 대한 반역과 저주와 처형과 사망의 골짜기이다. 아간을 처형하고서야 여호와께서는 그의 진노를 거두고, 아이 성 전투를 재개하신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이유도 아멜렉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헤렘 명령을 거역한 때문이다(삼상 15:1-34). 사울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는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주고 전리품 중 가치 없는 것은 다 진멸하고, 고가의 물품과 가축은 다 남겼다. 하나님은 사울이 불순종하여 헤렘을 범한 것을 용서하시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왕위를 폐하여 다윗에게 주셨고, 사울을 영원히 버리셨다. 그는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길보아 산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많은 군사들도 함께 죽었다. 헤렘을 범한 그가 헤렘이 된 것이다.

아간의 언약적 저주를 가리켜 단순한 도적질로 여기거나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노략과 탈취에 급급한 아간을 일벌백계로 다스려 정신 무장을 시킨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헤렘은 단순히 '바친 물건'이 아니라 '진멸해야 할 물건'이다.

글ㅣ손석태 박사(개신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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