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교회 담임 조건회 목사ㅣ예배목회연구원 원장   ©예능교회

이솝 우화에 '곰과 두 친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친구가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숲에서 곰이 나타납니다. 두 명의 친구들은 곰이 나타나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 중에 한 명의 친구가 길가에 있는 나무로 달려가 재빨리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는 가지 뒤에 몸을 숨깁니다. 하지만 다른 한 친구는 그 친구처럼 재빠르지 못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얼른 땅바닥에 누워 죽은 척을 합니다. 드디어 곰이 다가와서 그의 주위를 맴돌며 냄새를 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숨을 죽이고는 죽은 체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곰이라는 동물은 죽은 사람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곰은 그를 정말 시체로 생각하고는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 친구가 식은땀을 흘리며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나무 위에 숨었던 친구가 내려와서 그 친구에게 묻습니다. "내가 위에서 보니 곰이 자네 귀에 대고 무슨 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혼자 살겠다고 친구를 버리는 놈하고는 절대 사귀지 말라고 하더군!"

미국 캘리포니아 보건부에서 이런 조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누구든 간에 친한 친구도 없이 홀로 외롭게 지내거나 전혀 다른 사람과 교제 없이 지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확률이 3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정적으로 지칠 확률이 4배나 높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5배나 높고, 정신 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할 확률이 10배가 높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웃과 더불어 교제함으로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에게 다가오는 가장 심각한 위기는 바로 관계적 위기입니다. 결국 인간은 관계가 어그러질 때 불행해지고 관계가 원만할 때 행복합니다. 좋은 관계는 개인의 삶의 건강과 풍성함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놀라운 승리를 안겨다 줍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더불어 사는 삶, 함께하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유익과 복이 주어질까요? 우리는 그것을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될텐데,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로마 감옥에서 기쁨의 편지, 감사의 편지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의 사랑과 희생과 수고를 빌립보 성도들은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 감사의 표시로 성금을 모아 빌립보교회 담임목사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냅니다. 또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담요와 사식도 넣어주는 시중을 잠시 동안이라도 들게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정성을 다하여 사도 바울을 돕다가 에바브로디도가 갑자기 병이 들고, 결국엔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까지 갑니다. 27절에"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는 표현이 그 상황을 말해줍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근심하게 됩니다.

먼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일차적으로 담임목사인 에바브로디도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에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역자의 고통이 저들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놀러간 것이 아니라,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파송을 받아 공적인 임무를 띠고 갔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를 시중들라고 파송한 에바브로디도가 덜커덕 병이 걸려 죽기라도 하면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까를 걱정하기까지 합니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이 됩니다. 편안하게 해 드린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바울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근심하는 사람은 병들어 있는 에바브로디도 자신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빌2:26). 그러니까 에바브로디도 자신이 사도 바울을 감옥에서 돌보다가 병든 것을, 자신을 파송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들어서 알고 근심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데, 결혼한 자녀 중에 누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자녀의 입장에서는 중병이 들었어도 부모님에게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병든 사실로 인하여 부모님이 더욱 근심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육신적으로 아픔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모가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은, 부모가 마음 아파할 것을 더 생각하는 아름다운 근심입니다.

세 번째 아름다운 근심은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 성도들을 염려하는 사도 바울의 근심입니다. 사역자가 잠시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러 온 분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되면 그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죄송한 마음이 들까요? 더군다나 자신을 위해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를 파송해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얼마나 이일로 인해 근심이 되었던지 27절 후반부에 보면 "내 근심 위에 근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듯 모두가 자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걱정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미래를 염려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근심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특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도우러왔다가 중병에 걸린 에바브로디도를 위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마침내 낫게 해주셨다고 어떻게 고백합니까?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 2:27) 여러분은 이런 치유의 역사, 기적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사도 바울로 인해 탄생한 빌립보교회는 왜 자신들의 담임목사인 에바브로디도를 로마감옥에 있는 바울에게로 보내어 함께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다가 도리어 중병에 걸렸다가 병이 나은 에바브로디도를 아쉬운 상황속에서도 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25절)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쓴 이 기쁨의 편지를 통해 "함께하는 시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왜 필요하고 왜 중요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친밀함"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있는 에바브로디도를 이렇게 불러줍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25절)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에게 물어봅니다. 왜 결혼하려고 하세요? 둘이 결혼하는 목적이 뭐에요? 성경적인 원리에 앞서 흔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있고 싶어서, 밤에 헤어지기 싫어서" 여하튼 떨어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함께하는 거기에 참 사랑의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까이 만나는 믿음의 성도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연애편지를 500통 가까이 썼는데 정작 결혼은 누구하고 한 줄 아세요? 그 연애편지 전달하는 우체부와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서로가 가까워지고 친밀해집니다.

둘째로 함께하는 시간의 유익함은 "위로와 평강"입니다. 오늘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다시금 빌립보교회에 보내려는 이유에서, 함께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28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감이 됩니다. 어느 성탄절, 우체국에서 한 할머니가 길게 늘어선 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우체국 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우표 두 장 살 거예요." 우체국 직원이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을 넣으면 나오는데요."라고 말하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 기게는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함께하는 시간이 서로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은 교제하기 원하고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함께하는 시간의 중요함은 "필요의 채움과 보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26절)고 일컫습니다. 또한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절)라고 말합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서로의 필요와 부족함을 채우는 축복의 시간이 됩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전도에 나섰을 때 친구 한 사람과 같이 가는 도중에 길가에 쓰러져 추위에 떨고 있는 행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살을 에이는 추위에 자신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실상 도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친구는 그냥 가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선다싱은 두고 갈 수가 없어 친구와 다투다가 친구 먼저 가게 하고 자신은 쓰러진 행인을 등에 업고 산길을 갑니다. 한참 가다보니 앞서가던 친구가 길에 쓰러져 얼어 죽어 있더랍니다. 혹독한 추위에 자신의 체온을 견디지 못해 비극을 맞이한 것이죠. 그러나 선다싱은 들쳐업은 사람의 온기로 인해 두 사람의 체온이 합쳐져 얼어붙은 추위를 녹이며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어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가려면 같이 가라) 진정 혼자서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에게 행동의 책임을 점검받을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넓은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세우고 돕는 헬퍼(Helper)입니다.

넷째로 함께하는 시간의 유익함은 "힘과 생산성"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향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25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싸우는 군사임을 자랑합니다. 유명한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21세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파트너십이다." 인도의 테라사 수녀는 연합과 하나됨의 효율성을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당신이 할 수 있고, 당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 리더십의 대가인 죤 맥스웰이 격려하듯 "우리는 함께 일할수록, 함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나라의 번영과 안정도 이 하나됨, 즉 연합의 원리 위에 세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아마 어떤 분들은 비행기만큼 빠른 교통수단은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좀 더 생각이 깊은 분들은 공항이 서울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태풍이 불고 폭설이 내리면 비행기가 뜰 수 없기 때문에, 고속철도(KTX)을 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멀고 험한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어 오히려 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사랑에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배고픈 줄 모르고, 피곤한 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은? "그대와 함께라면" 더 맛좋은 라면은? "주님과 함께라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앞서 말씀드린 복을 온전히 누릴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에바브로디도가 어떻게 함께하는 시간 속에 있었습니까? 사실 저들은 몸이 함께 있던지, 떨어져 있든지 상관없이 영과 혼과 몸이 이미 하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하는 시간에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몸만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5가지 사랑의 언어> 책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함께하는 시간" 이라 함은 누군가에게 온전히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TV방송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지 배우자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함께하는 시간은 TV를 끄고 소파에서 마주 보고 앉아 대화하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둘만이 오붓하게 산보를 한다든지, 외식을 할 때도 서로 마주 보며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남성은 공간적 개념에 머물러 있고, 여성은 공감을 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한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적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둘째는 목적과 뜻이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어느 고층 건물 앞에서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고 혼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사람이 좀 거들고 싶어서 함께 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은 더욱 더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혼자 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니 우습게도 한 사람은 이 짐을 밖으로 끌었고 또 한 사람은 짐을 안으로 끌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한 모양을 취했어도 방향이 다를 때에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목적과 방향이 하나이어야만 일치가 가능한 것입니다.

세째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함께하는 시간은,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교회 성도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인격과 영혼이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한 평생을 함께 살았어도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면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원이 하나이고 서로 사랑하면 하나입니다. 어떤 박사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업을 크게 경영하는 분이었고 아내는 대학교수였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30년 동안 별 탈 없이 편안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 부부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생 이렇다 할 정다운 대화 없이 냉전 아닌 냉전으로 30년을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뜻한 바가 있어 두 사람이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전에 없이 남편은"여보 내가 잘못했소, 미안하오"하더랍니다. 깜짝 놀란 부인은 사흘 동안 감격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지난 30년 동안에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고 더구나 사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남편에게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옳고 잘났다고 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낸다 해도 진정한 화해도 일치도 없습니다. 그저 동숙자일 뿐 가정도 사랑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소원 안에서만 진정 하나됨을 이루어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3-5) 내 마음 네 마음에 맞추고 네 마음 내 마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에 서로가 코드를 맞출 때, 우리는 진정 하나가 되고 함께하는 시간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조건회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M.Div),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Th.M), 시카고 매코믹신학교(목회학 박사 D.min)에서 수학해 현재 예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한국 다리 놓는 사람들 이사장 (예배사역단체)을 맡고 있기도 하다.
 저서로는 '신앙위인들을 위한 기도, '예배, 하나님과의 만남+ 영문판',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 등이 있으며 1999년 음반집 '아무것도 염려치 말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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