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7~48, 사실 이 부분은 깊게 들어가면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의미하려고 하셨는가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속마음을 세심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과장법"과 같은 수사적 표현들이 적잖게 있는데 문자 그래도 이해하다가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의 규범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해석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자들이 율법을 폐기하는 분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지키라고 한 수준보다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수준에서 율법을 지키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폐기론자이기는 커녕 율법을 더 철저화한 근본주의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의 차이는 규정이 얼마나 강한가와 관련된 "정도의 차이"인가요? 아닙니다. 율법학자들은 "규정"에 집착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에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변하지 않으나 그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규정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여러 가지 규정들 중 가장 철저한 수준의 규정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으로써 율법 폐기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잘 못되었음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들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정신에 무게중심을 두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규정"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율법학자들의 옛 규정을 단지 새로운 규정으로 대체하신 것입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또 하나의 율법학자"가 되시겠죠.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새로운 규정을 이해하고 실제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5:29~30에 입각해서).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규정은 모든 사람이 준수하지 않으면 정죄함 받는 일률적(一律的)인 기준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철저화했을 때 수행할 수 있는 이상적(理想的)인 행동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용서하기도 힘든데요. "원수를 사랑하라"를 또 하나의 규정으로 간주하면, 연쇄살인범에 가족을 잃고 분노하는 그리스도인 가족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 고려할 때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과장해서' 보여주시고, 율법의 정신을 생각해서 여기까지 이르도록 각자가 노력하라는 권면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이 이 구절에서 포착해야 할 그 다음 중요한 점입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를 마음에 품으면 그 목표에 이렇게 저렇게 접근하기 마련입니다.

기장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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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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