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목사   ©미주 기독일보DB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강도 만난 사람들이 없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청지기'라는 단어는 인간의 본분을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시간을 주님 뜻대로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청지기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권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권위를 사용해야합니다. 지식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지식을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누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이웃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했던 사람들이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물도 많았습니다. 사회에 영향을 끼쳤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회는 불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

영생에 관심이 있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여러분,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을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돼 있느냐?"(26절)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27절)

"그대로 행하라"

구약의 모든 율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국민교육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모두 가슴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삶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거창한 사색, 철학, 관념에 머무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관심을 가진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이웃, 도움이 필요한 이웃, 억눌리고 상처받고, 버림받은 수많은 영혼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들 가까이에서 돕고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생은 철학적 사명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으로 정의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영생을 깨닫게 해줍니다. 마틴 루터는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인생을 못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면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가 다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29절)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시키려는 율법학자의 의도가 보입니다. 그는 지금 변명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율법학자의 주장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면 그 이웃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규정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가르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교묘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는 합리화와 변명이 숨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해가려는 교묘함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할만한 이웃,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웃

율법학자들은 명백한 진리를 피해가려고 합니다. 누가 이웃인지 몰라서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의 이면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까요. 사랑할 만한 이웃이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행동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반도는 수없이 많은 외부 민족과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외세침략도 많았던 곳입니다. 이스라엘만큼 외부의 침략이 많았던 지역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사이에 놓인 땅'이라고 합니다.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아래의 애굽 문명의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위쪽이 강해지면 아래로 내려오고, 아래가 강해지면 위로 올라가는 지역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동족은 이웃으로 생각하고, 이방민족은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들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밖의 민족들은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사랑할만한 이웃이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축소시켰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율법학자의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습니다. 바위가 많아 강도나 도둑이 도망가거나 숨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피해갔습니다.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다가 강도당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 또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그냥 지나간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가는 이유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거나 만지면 2주 동안 직무정지를 당하는 율법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유대인과 원수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이 그 곳을 지나다가 강도당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주인에게 이틀 치 생활비를 주면서 돈이 부족하면 더 내겠다고 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율법학자에게 질문하셨습니다."너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36절) 예수님의 질문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누가 자신의 이웃이냐고 질문했었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셋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주어를 바꾸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이웃을 사랑하려면 누가 이웃인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이웃인지 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이웃이 될 지를 먼저 생각하면 이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설교가 헬몬트 트리케어 목사님은 '사랑은 필요 그 자체를 발견하도록 해준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웃의 불행을 보도록 해주고, 사랑은 손보다 먼저 눈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의 말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는 이웃에 대한 정의, 우리가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한 세미나와 토론들이 가득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섬기고, 도와야 될 이웃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랑 없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하면 주님은'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
지'를 되물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던진 질문이 바로 그 질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원수같은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증오의 악순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미움이 또 다른 미움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개인 간의 관계, 국가 간의 관계, 민족 간의 관계, 지역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서로 사랑하는 선순환으로 바꾸는 일은 서로 사랑할 때 시작됩니다. 개인의 생각을 뛰어넘고, 민족 간의 이념을 뛰어넘고, 변화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십자가의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하지 않았고 눈앞에 나타난 강도당한 유대인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처럼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베일 속의 사람은 강도에게 당한 것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죄로 인해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베일 속의 사람은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미워하던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항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잠시 동안 은혜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영광스런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승천하기까지 평생을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 약간의 돈을 주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갚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부요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이웃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사랑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보여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없도록

이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길을 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면 사마리아인입니까? 도움을 줄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까?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진 직업, 힘, 경제력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앞을 내다보는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강도가 나타나지 않는 사회가 되도록 앞서 사랑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강도를 예방하고, 더이상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해야할 역할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 받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들, 사회로부터버림받은 사람들,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들이 없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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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