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 의료선교사 O. R. 에비슨의 한국 선교(2)

오피니언·칼럼
기고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장, 청교도신학원 교회사)

※ 기독일보는 내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해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글을 연재합니다.

4. 에비슨의 선교신학 - 알렌과 언더우드와의 동행

류금주 박사

1909년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이하여 의료선교의 역사를 회고하던 에비슨은 1908년 6월 3일 제중원의학교가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하던 그날을 감격으로 떠올렸다.

미래에 이 날은 한국의 국경일로 기념되어 좋을 것입니다. 그날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공식적으로 이 사역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는 동안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그들의 기술과 지식의 전파에서 얼마나 충성스럽고 능력이 있는지를 증명하였습니다.

에비슨은 제중원의학교 첫 졸업생들을 안수 받은 사역자(ordained to this ministry)로 부르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의료사역은 복음전도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말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의 우열의 비교는 성립될 수 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선교되던 첫날부터 병원이나 학교와 같은 통로를 개척하고, 거기 따라 교회를 세운, 그런 역사를 형성해왔다. 그 설립과 발전의 선후관계는 반드시 명료하게 체계화되지 아니하였지만, 복음과 사회는 늘 병행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의 민족적․사회적 공헌은 한국교회의 사회사(社會史)를 형성하게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에비슨은 효율적인 선교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균형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영과 혼과 육의 세 가지는 불가분리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에비슨은 육체적 단련과 정신적 훈련만을 강조하는 정부가 있다면 그 사회는 영적인 측면을 배제함으로 해서 도덕성의 상실로 결과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가 영적 문제만을 강조하면서 정신을 훈련하지 않으면 교회는 미신과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인간의 사고 안에 넣어두신 영광스러운 것들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라고 권고한다. 또한 영과 정신만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영혼과 정신의 복지가 심대하게 의존하고 있는 육체를 멸시하거나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이 영을 주신 것만큼 정신과 육체도 주셨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전체로서의 교회에 대해 참되며 선교단체들의 계획과 방법에서 이것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합니다.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 ©wikipedia

그런데 영과 혼과 육을 모두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그의 외침은 의료선교에 대한 복음전도의 우위를 주창하는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향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1934년 서울의 경신고등학교에서 열린 한국선교 50주년 기념대회에서 에비슨은 빈톤과 그와 함께 한 평양의 복음전도 주창의 선교사들로부터 겪었던 어딘지 모를 섭섭함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의료선교를 복음 전파의 악세사리 또는 준비단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료봉사는 그 자체가 선교이다.

전도 이상의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먼저 사람들이 현재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을 보여야 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 그러나 전 생애를 선교사역에 바치기 위해 온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신들의 의료봉사를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민경배 교수는 바로 이 점에서 에비슨의 선교신학은 알렌과 언더우드의 선교신학과 그 기맥이 상통하고 있다고 보았다.

한국에서 실로 의료나 교육이 기독교적 정신으로 수행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선교 곧 가 된다는 심오한 선교신학은 알렌, 에비슨, 그리고 언더우드를 연결하는 계보(系譜)에서 온갖 굴곡을 겪어 가며 성실하게 지켜 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감격으로 일독(一讀)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서울스테이션에서 알렌과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서로 같은 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행은 서울스테이션에 대한 평양계 선교사들의 견제라는 지역적 요소뿐 아니라 선교신학적 공감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우선 에비슨과 빈톤 사이에 있었던 선교신학적 갈등은 수 년 전 알렌이 복음전도가 의료선교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중원의 의사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6-1890)과 겪은 갈등이 재현된 것처럼 보였다. 또한 언더우드가 서울에 고등교육기관을 세우려고 했을 때 평양지역의 선교사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은 것은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을 건립을 추구할 때 그 기금의 사용 문제로 같은 지역의 선교사들로부터 곤란을 겪은 것과 비슷하다. 언더우드의 경우 이미 평양에 전문학교인 숭실학교가 있을 뿐 아니라 서울에 세워지는 이 고등교육기관의 이른바 세속교육 실시 계획이 그들의 노여움을 산 까닭이었다. 세브란스병원과 연희전문학교의 건립을 둘러싸고 서울스테이션의 이 두 선교사가 서로를 적극적으로 돕게 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

5. 에비슨, 한국을 떠나다

에비슨 선교사 ©연세대

에비슨이 은퇴할 즈음에 이르러서 세브란스의 성장은 병상수 184개, 선교의료진 9명, 한국인 의사 32명, 의학생 172명, 선교간호원 5명, 한국인 간호원 36명, 간호학생 54명, 총 졸업생 의사 352명, 총 졸업생 간호원 165명의 규모와 같았다. 또한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일본 정부 문부성에 의해 승인되어 졸업생들이 물론 대만과 만주를 포함하여 일본이 지배하는 영토 안 어디서든지 개업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마지막 공로라 할 수 있다. 한편 1900년 미국에서 기증된 3000원의 예산으로 시작한 것이 그가 회고록을 쓸 당시 대부분 한국에서 조달되는 450,000원의 예산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1935년 어느 날 밤 에비슨 부부를 떠나보내는 윤치호의 송별사는 그 이후 언제나 에비슨 부부와 한국민의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에비슨 박사님, 보시는 것처럼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250명의 남녀가 당신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기 위해 오늘밤 여기에 모였습니다. 나는 한국 전체에서 그 어느 누구도 떠나면서 당신처럼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감사와 슬픔의 감정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감히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작별의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들 모두는 한 사람 속에 내재한 두 인간의 모습, 즉 위대한 대중의 은인과 위대한 개인적 친구를 잃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민의 은인으로서 당신은 누구나 자랑스러워 할 기념물을 뒤로 하고 떠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세브란스 기지 내에 동창회가 건립한 당신의 청동 동상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살아있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지금 이 순간에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감동으로 그 동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동상보다 당신이 시작했던 전도 사업의 주요 분야에서 사업을 계속하는 당신의 두 아들, 즉 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는 아들과 의학전문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다른 아들을 더 훌륭한 기념물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기념물보다 더 숭고한 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세 개의 위대한 기관인 세브란스병원,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남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가장 위대한 기념물은 당신의 선행을 1,000배로 배가시킬 두 대학으로부터 배출되는 졸업생과 병원의 사명에 의해 혜택을 입게 될 환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친구로서 당신이 떠나면 우리 가슴 속에는 당신의 동상도 아니요, 당신의 아들도 아니요, 졸업생도 아니요, 당신 병원에서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아닌, 그 무엇도 채워 줄 수 없는 빈자리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채울 수 없는 빈자리를 의미 없는 평범함으로 채우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단지 헛수고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로 인사를 끝내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소서.

 

연희전문 본관(스팀슨관) 앞의 에비슨 교장 부부 ©동은의학박물관

내한 의료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은 이렇게 해서 한국을 떠나갔다. 1935년 12월 2일, 42년 선교의 성상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내가 80세가 넘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전쟁은 세계를 분열시키고 우호 관계를 단절시켰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의 내 아내의 마음처럼 나도 한국인과 함께 할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캐나다로 돌아간 이듬해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내고 20년 후인 1956년 8월 28일 96세를 일기로 미국 플로리다에서 서거하였다.

올리버 에비슨, 그는 한국교회가 선교 초기의 시행착오를 넘어서서 한국의 교회로서 그 틀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할 무렵 한국에 왔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선교의 시대적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고 갔다. 윤치호의 말처럼 한국 선교에 남긴 그의 고귀한 사명 수행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다시 만날 때까지 사라져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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