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일보는 내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해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글을 연재합니다.
1. 에비슨 선교의 시대적 맥락
1966년 5월 14일, 연세대학교는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내한 의료선교사 에비슨의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Oliver R. Avison, M.D. LLD.
1860-1956
영국에서 태어나고 캐나다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으며 한국에서 봉사하고 미국에서 죽다.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병원 및 간호학교의 창립자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제2대 교장을 역임하고 한국 발전에 있어서의 지대한 공헌자임. 이 동상은 1893-1935년에 걸쳐 선교의사로서 긴 안목을 가진 지도자로서, 한국인의 친구로서,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국 국민에게 바쳐진 그 기념비적인 봉사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뜻으로 그의 제자들과 한국인 친구들에 의해 건립된 것임.
1966년 5월 14일
연세대학교 창립 8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1893년 8월 서울에 와서 1935년 12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42년 동안 한국 선교에 헌신하였다. 1957년, 17년 동안 에비슨이 두 학교 공히 교장으로 있었던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통합하여 출범한 연세대학교의 초대총장이자, 연희전문학교에서의 그의 최초 8년이 그의 상사(上司)인 에비슨의 최후 8년과 겹치는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에비슨의 한국 선교시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에비슨 박사는 자기가 한국에 사는 동안, 한국을 전리품으로 놓고 싸운 두 큰 전쟁을 목격하였고 또 자기가 15년 동안 궁중 시의(侍醫)로서 모시던 국왕의 양위(讓位)와 한국 국권의 종막도 친히 보았다. 일제의 한국 강점, 제1차 세계대전, 한국의 독립운동, 한국인의 끊임없는 항쟁, 교회의 발흥, 교육과 경제의 진보를 위한 투쟁, 동아세아에 있어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확대, 혁명사상의 팽배 등은 박사와 그 동료가 대처해야 할 복잡한 배경을 짜놓았다. 그는 퇴임시까지 새 한국의 여명을 그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였으나, 한국인의 열망 실현을 위한 역할을 맡은 새 세대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고종의 양위와 한일합방, 기독교의 한국 선교와 한국의 근대화,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막과 3․1운동, 일본군국주의와 한국의 독립항쟁 등이 에비슨이 한국에서 선교하던 기간의 주요한 시대적 배경을 이룬다.
한편, 에비슨이 내한한 1893년 무렵의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 10여 년의 시행착오를 어느 정도 지나오면서 교회의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독자적인 선교정책을 수립한 것이 이때이고 선교 지역의 예양(禮讓) 문제가 거론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기독교가 전국에 반가이 소개되었고, 교회는 민족의 교회로서 틀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1895년! 기독교가 민비시해의 아픔을 함께 당하고, 종사(宗嗣)를 구하고, 역질(疫疾) 치유에서 인간애로 희생과 봉사로 동행하고, 백정과 같은 비탄의 계층을 해방하고, 굿의 횡포에서 나라를 건져냈다면, 확실히 1895년은 한국 근대사의 빛나는 첫날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1888년의 종교 금지령 이후라는 것이 민경배(閔庚培) 교수의 통찰이다. 그는 언더우드 부처와 아펜젤러 부처를 중심으로 하여 전도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1888년의 금교령과 어린이 소동(Baby Riot)을 하나의 전기(轉機)로 판단했다는 것을 포착했다. 복음 전도의 모든 경계와 위기감이 이때 결정적으로 터져서, 그것이 일단 진정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의 조심과 종용이 의미 없게 되었음을 선교사들이 의식했다는 것이다. 에비슨 역시 한국의 의료선교 역사를 회고하는 그의 보고서에서 이 사건에 주목했던 것을 보면, 에비슨이 내한할 무렵의 한국교회는 확실히 전과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에비슨의 한국 선교의 요체라고 할 만한 그의 두 기독교전문학교 교장직과 선교병원의 원장직 수행 역시 이러한 시대적 전환에 흐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이렇다. 먼저 후일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한 제중원(濟衆院)을 에비슨이 맡게 된 것은 그가 서울에 온 직후인 1893년 11월 1일부터이다. 1885년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에 의해 시작된 왕립병원 제중원은 번성했던 초기와는 달리 에비슨이 부임할 무렵 그 위상이 현격하게 실추되어 다른 기관으로 넘어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병원을 다시 되살리고 정상적으로 회복하며 확장하며 다음 세대를 기약하는 의료교육의 제도적 확립 등이 에비슨에게 주어진 시대적 임무였다. 다음으로 연희전문학교의 경우, 1915년 경성학교 대학부로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이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처음 출범할 때 에비슨은 부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언더우드가 아깝게 서거하고 에비슨은 동 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학교의 조직과 안정과 성장이 모두 그의 역사적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살필 때, 에비슨 선교의 시대적 사명은 그의 시대 한국교회의 사명과 겹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한국교회가 처음의 시행착오를 어느 정도 거치면서 이를 발판 삼아 확고한 방향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방면에서 교회의 틀을 갖추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에비슨 역시 알렌과 언더우드에 의해 일단 시작된 의료와 교육 사업을 그 틀을 갖추고 정신을 형성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책임을 자신의 사명으로 간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직화와 구형(構形)이 한국교회에 대한 그 시대의 요청이었고 에비슨의 사명이었다.
2. 제중원의 선교부 전관과 에비슨
1893년 11월 1일 에비슨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을 때 병원 관리자가 거의 40여 명에 달하였고 환자는 1명에 불과했다.
어비신 박사가 구리개병원의 원장으로 피선되었을 때 정부 관계자로서 이 병원을 관리하는 사람의 수효가 근 40명이나 되었다. 이중에 다수는 45명이나 되는 하인들을 데리고 병원 구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다수한 사람들은 상감께서 병원경비로 보조하는 돈을 의뢰하고 있었다. 그중에 환자라고는 한사람 밖에 없었는데 그는 청년으로서 무릎이 곪았었다. 그의 모친이 그를 데리고 캄캄한 방 안에서 병구완을 하고 있었다. 고름 짜낸 것을 방구석에 쌓아 두어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왕립병원은 부패해 있었다. 매년 임금이 내려주는 병원경비의 80%가 관리들의 기생(寄生)에 쓰이는 형편이었다. 병원은 단순한 진료소 수준으로 그 위상이 격하되어 있었다. 그곳에 오는 환자들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만 왔으며, 진료소에 올 수 없을 정도로 아픈 환자들은 이마저 이용할 수 없었다. 병동 환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지급되지 않았으며 수술 설비는 전혀 없었다. 제중원은 거의 폐장의 지경에 이르렀다.
부임한 후 6개월 동안 일을 하면서 왕이 경비로 하사하는 3000원 중 절반을 이미 받았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반의 반 밖에 받지 못하는 등 정부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에비슨은 용단을 내렸다. 제중원의 일에서 물러난다는 단호한 결심을 관리들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제중원 사임과 관련한 모든 문제를 공식적인 조직을 통해서 처리했다. 에비슨은 자신을 찾아오는 관리들을 항상 미국공사 알렌에게 보냈다. 그도 한국의 선교 실행위원회와 뉴욕의 선교본부에 편지를 내 그의 조치를 통보했다. 거의 6개월 동안의 협상 끝에 마침내 1894년 9월 13일, 그가 원장을 맡은 지 10개월 만에 그리고 제중원이 세워진 지 9년 만에 제중원은 선교부 전관(專管)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인 에비슨의 단호하고 공식적인 일 처리가 주목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는 한국에 올 때 그의 나이 33세, 그는 이미 캐나다 토론토의과대학의 교수요, 시장의 주치의로서 안정된 기성(旣成)의 인물이었다. 대부분 20대 중반이었던 초기 내한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는 구분이 되었다. 더욱이 “처음”이라서 그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피할 만큼의 한국 선교 역사를 에비슨은 그의 선교의 바탕에 재산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3. 세브란스병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의 양상
1897년 가을 건강이 좋지 않은 에비슨 부처와 언더우드 부처에게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휴가를 갖도록 권한다. 일본과 중국에서 쉬는 동안 에비슨은 그의 필생의 의료사업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요컨대 의학교육의 착수와 위생원리의 고취가 그것이었다. 에비슨은 한국에서 은퇴한 후 1940년 80세 생일에 쓴 그의 회고록의 서문에서도 이 두 가지를 적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나로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에서 무슨 책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매일 매일 생활을 해왔다. 오로지 주민의 병고를 덜어주고 인구를 격감시키는 고도의 사망률을 줄이며, 그러던 중 우리가 시작만 할 수 있었던 의료 사업을 수행할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다. … 이 책은 맷돌의 두 돌, 즉 힘 있고 나쁜 짓을 하는 인접국가인 윗돌과 경험이 없고 정치적으로 어리석었던 아랫돌 사이에서 짓밟혔던 한 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도왔던 한 개인과 가정의 노력을 기록한 부분적인 기록에 불과하다. 한국의 저변에는 훌륭한 물리적 생동력이 있는 것으로 입증됐다. 다만 일시적으로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국과 동등하게 일깨워진 지적 능력이 바탕에 깔려 있다.
에비슨의 이러한 의료사업의 방향은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에서 구체화되었다. 1900년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는 에비슨의 갸륵한 뜻에 감동되어 한국에 건립될 현대식 선교병원을 위해 1만 불을 희사한다. 그런데 이 선교병원의 설립 기금을 두고 어떤 제재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에비슨의 생각과는 달리 한국에 있는 일반 선교사들의 뜻은 달랐다. 일반 선교사들은 병원을 호화스럽게 건축함으로써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자선사업 하는 기관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 더욱이 그들은 ‘뉴욕’ 선교본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병원 건립에 5천 달러만 쓰고 나머지 5천 달러는 복음전도 사업에 전가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에 있었던 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그러한 주장이 나온 것이 아니고 평양에 있었던 선교사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었다. 5천 달러를 복음전도 사업에 전가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이들이 의료선교를 복음전도와 비교해 평가절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선교신학의 갈등 양상은 두 가지 형태가 얽히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첫째, 지역적 요소이다. 즉 평양과 서울의 문제이다. 둘째, 복음전도와 의료선교와의 관계 문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소가 얽혀 있다고 보는 것은 평양의 복음전도를 주창하는 선교사들이 에비슨의 내한을 전후로 하여 서울스테이션의 의료선교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97년 가을 여의사 휠드(Dr. Eva H. Field)와 함께 제중원에 파송된 간호원 쉴즈(Miss E. L. Shields)는 그녀의 건강이 과중한 일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1901년 가을부터 1904년 가을까지 북부 한국에서 복음전도의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도 시간의 반은 복음전도에 반은 병원 일에 보냈고, 그녀가 병원 일에 전심을 다해 봉사하고 간호원 양성학교를 조직한 것은 다시 1년의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1906년 가을에서야 가능했다.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사이의 선교신학적 갈등 양상은 이렇게 해서 지역적 경계마저 헤치고 나타났다. 그 전형적인 경우를 에비슨의 제중원 전임자 빈톤(C. C. Vinton, 1856-1936)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전임자가 오전에는 다른 임무에 전념했고 오후에만 진찰실에 출근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전혀 출근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 내원환자 기록을 살펴봤더니 알렌이 일을 했을 때는 매일 30-40명의 환자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15명을 넘지 않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이렇게 환자의 수가 감소한 것이 아마도 의사의 관심이 없었던 결과 때문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많은 수의 환자를 끌어들일 수 있게 진료를 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서 빈톤이 전념한 다른 임무란 바로 대개의 평양의 선교사들과 신학적 기맥을 같이 하는 복음전도를 말한다. 그는 병원을 “종교기관으로 구조 변경하려는 생각을 굳히고 ... 그것이 반대에 부딪히자 병원 문을 한때 닫았”으며 제중원 경비를 항목 이외에 즉 종교 활동에 지출하여 미국 공사를 통해 조선 조정의 엄중한 항의까지 받고 말았다. <계속>
#류금주 #류금주교수 #류금주원장 #에비슨 #한국기독교선교140주년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청교도신학원 #기독일보 #OliverR.Avison #세브란스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