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정보국 요원 기헌에게 특별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인류가 만든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지요. 서복은 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영원히 죽지 않도록 만들어진 실험체입니다. 그는 인류가 겪는 모든 질병을 해결할 열쇠를 지닌 존재이기에 여러 집단의 표적이 되는데요. 불치병에 결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기헌은 서복을 통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서복과 동행하게 됩니다. 서복을 노리는 자들을 피해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서복과 기헌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복제인간도 인간인가?
서복을 가리켜 ‘저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대사는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애당초 서복은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한 과학자의 연구 끝에 탄생된 존재인데요. 아무리 그립다고 해도 죽은 자녀의 세포를 복제하여 대체자녀를 얻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한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복제라는 인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대체자녀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비록 가슴 아프지만, 자녀를 잃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인내하며 묻는 것이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인간들은 서복을 그저 실험체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용하려 합니다. 서복을 영구히 결박시켜 놓고 질병 치료에 필요한 세포들을 계속해서 추출하려 하지요. 이러한 처사는 일견 매우 잔인해 보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들이 파국을 맞게 함으로서 서복의 생명체로서의 가치에 대해 다소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만, 엄밀히 따져서 우리는 서복이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란 부부간의 진실한 사랑과 성교를 통해 출산되는 존재로 인간을 복제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피조세계 안에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는 심각한 악행이기 때문이지요.
영생을 향한 인간의 덧없는 욕망
서복을 제거하려는 이들은 ‘인간이 죽지 않으면 인류는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고, 서복은 자신을 차지하려는 인간들을 가리켜 “참 어리석네요”라고 내뱉습니다. 이러한 대사들은 주제의식이 담긴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요. 애당초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진 서복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도 영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죽음은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서 주어진 형벌입니다(창세기 3:19).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죽음을 거부할 수 없으며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기 12:10)는 욥의 진술은 죽음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대기업 회장은 불치병에 걸렸는데 치료는 물론 영생까지 원합니다. 만병통치약을 얻어내기 위해 서복의 연구개발을 은밀히 후원함은 물론, 마침내 서복을 독점적으로 차지하려 하지요. 이렇듯 부유층이나 거대 기득권층이 영생의 기술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려 한다는 내용은 <프로메테우스>(2012)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만약 불사(不死) 내지 불로(不老)의 기술이 상용화된다고 해도 이는 재력이 있는 소수 계층만이 향유할 것이 틀림없기에 또 다른 사회윤리적 문제를 낳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함으로써 영생이란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헛된 탐욕의 결과물임을 시사해줍니다.
죽음, 복된 관문이자 복음의 핵심
‘죽기밖에 더하겠는가’라는 대사는 반어적으로 느껴지는데요. 모든 인간은 삶을 향한 선천적 욕구를 갖고 있기에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있으므로 인간은 육체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성숙한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죽음이란 타락한 현실세계 속에서 인간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고삐와도 같은 것이지요.
기헌은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이기에 유난히 서복과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죠. 이렇듯 사람은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가장 진실해지고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한편 죽음이 예외 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죽음은 곧 심판의 전망으로 이어지는데요.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에서 살아서 믿는 동안에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전망은 인간의 행동과 인생관을 바꾸게끔 하지요. 기독교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저 삶이 종결되는 지점이 아니라 영생에 들어가는 복된 관문이라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영생이란 인간의 덧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삶이란 유한하기에 의미 있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요. 하지만 영원히 산다는 것도 두려워요”라는 서복의 대사야말로 죽음에 대해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진솔하면서도 올바른 태도 아닐런지요.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